올초 글로벌 인공지능(AI)업계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AI핀’을 개발해 세계의 주목을 받은 휴메인이 HP에 헐값에 팔렸다는 것이다. 당초 거론되던 인수 금액(10억달러)의 10분의 1 수준인 1억1600만달러(약 1600억원)에 기업이 통째로 넘어갔다. HP는 휴메인이 보유한 AI 엔지니어 인력만 자사 프로젝트에 재배치하고 AI핀 서비스는 중단했다.
AI핀은 옷에 붙여 쓰는 소형 AI 기기다. 디스플레이가 없는 대신 음성과 터치 조작으로 제어한다. 레이저 프로젝터로 손에 영상을 비춰 사용하거나 카메라로 움직임을 인식시켜 조작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의 뒤를 이을 차세대 기기로 평가받아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에게서 1억달러(약 1400억원)를 투자받았다. 한국에선 SK네트웍스가 2023년 휴메인에 2200만달러(306억원)를 투자해 지분 2.6%를 확보했다. LG도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통해 돈을 넣었다. SK텔레콤은 한국 출시를 검토할 정도로 AI핀은 차세대 기기로 주목받았다.
시장 외면받은 AI 디바이스
야심 차게 출발한 AI핀의 운명은 출시 1년도 안 돼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지난해 4월 제품 출시 당시 가격은 699달러(약 98만원). 여기에 매달 구독료 24달러(약 3만4000원)를 내야 했다. 속도는 느리고 배터리 수명은 짧았다. 미국 테크매체 더버지가 지난해 5~8월 휴메인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AI핀은 판매량보다 반품된 수량이 더 많았다.
AI핀과 비슷한 또 다른 AI 디바이스인 ‘R1’의 운명도 비슷했다. 래빗이 야심 차게 만든 이 기기는 구매자 약 10만 명 중 현재 사용자가 5000명에 불과할 정도로 ‘폭망’의 길을 걷고 있다. R1의 부진과 함께 AI핀까지 퇴출되자 테크업계에선 ‘AI 디바이스 잔혹사’라는 말이 회자됐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스마트폰에 AI 기능을 앞다퉈 적용하는 와중에 AI 전용 기기가 소비자의 추가 지출을 끌어내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궁금해한다. 새로운 AI 하드웨어는 스마트 안경 정도에서 멈추는 걸까. 스마트폰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AI 기기는 어떤 가치를 추가로 얹을 수 있을까. 시장의 의구심이 커지는 와중에 최근 새로운 소식이 이목을 끌었다. 올트먼 CEO가 애플 수석디자이너 출신 조너선 아이브가 참여하는 AI 하드웨어 스타트업에 최소 5억달러(약 7000억원) 투자를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기기 형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회사 측은 ‘휴대폰은 아니다’고 했다. 애플워치 디자이너로 유명한 탕 탄도 이 스타트업에 합류했다.
'스마트 안경' 넘어선 미래 기기
챗GPT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를 갖추고 있는 올트먼이 AI 기기 개발에 목매는 이유는 명확하다. 빠르게 발전하는 AI 에이전트 기능을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하드웨어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다. AI 시대에도 하드웨어 플랫폼의 영향력은 막강할 것이다. 이용자는 챗GPT를 쓰면서도 물리적으론 애플 아이폰이나 삼성 갤럭시에 묶여 있다. 애플의 음성 비서 시리에 챗GPT와 구글 제미나이 중 무엇이 먼저 적용되느냐를 두고 두 회사가 기 싸움을 벌인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완전히 새로운 기기를 선보여 AI 시대의 ‘아이폰 모멘트’를 만들겠다는 것이 올트먼 CEO의 야심이다.
수요가 있다면 ‘거대한 전환’은 언젠가는 이뤄지기 마련이다. 첨단 기술을 담아낼 미래형 기기는 결국 등장할 것이다. AI핀은 용감한 도전이자 안타까운 낙오자로 기록될 뿐이다. AI 기술을 온전히 담을 하드웨어의 형태는 범인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일 수도 있다. 스마트폰 하드웨어 생태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은 새로운 디바이스의 시대가 오면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그저 상상만 하고 있다간 한국의 설 자리는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