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발맞춰 주4.5일제"…노조로 뭉친 '판교맨' 달라졌다 [김대영의 노무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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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역. 사진=성남시 제공

판교역. 사진=성남시 제공

국내 정보기술(IT) 업계 노사관계에서 '판교 모델'이 한층 더 선명해지고 있다. 판교 모델은 기업별 교섭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초기업적 다층 교섭 구조로 작동하는 노사관계를 말한다. 최근 IT 업계에선 개별 법인 단위 임금·단체협상을 넘어 산업 공통 의제를 공동요구안으로 묶고 자회사 매각·분사·서비스 종료 같은 경영 판단에 관해 모회사와 그룹 차원의 책임을 묻는 흐름이 확산하는 중이다.

IT 업계 '판교 모델' 속도…주4.5일제 요구 공식화

30일 노동계 등에 따르면 최근 IT 업계 노사관계는 판교 모델이 본격화하는 상황으로 풀이된다. 판교 모델이란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지난달 국내 IT 노사관계를 설명하면서 규정한 개념이다. 이 모델의 핵심은 법인별 교섭의 외형 아래 계열사·자회사 간 정보 공유와 교섭 결과의 비교·연동이 일상화됐다는 것이다.

실제 네이버·카카오 등 주요 IT 노조들은 개별 회사와 교섭하면서도 사실상 본사와 계열사의 동등한 처우 수준을 요구해 왔다. 네이버·카카오 같은 IT 기업 본사의 경우 전체 직원 1인당 평균 급여액이 1억원대에 이르지만 손자회사로 내려갈수록 근로조건이나 처우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례들이 적지 않다.

IT 노조들은 이를 산업 차원의 '공동요구'로 끌어올렸다. 판교·분당 지역에 IT 기업들이 몰린 점을 활용해 산업 공통 의제를 추진할 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가장 최근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가 주4.5일제를 공동요구안에 포함한 것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IT위원회는 지난 24일 판교에서 연 ‘2026년 공동요구안 중간보고회’에서 주4.5일제를 올해 공동요구안으로 채택했다. 지난해엔 직장 내 괴롭힘 방지, 공정한 평가기준 공개, 전환배치 절차 개선, 분사·인수합병 시 노동자 권리 보호 절차 명확화 등을 공통의제로 제시했다. 올해는 근로시간 단축을 산업 차원의 의제로 끌어올린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가 지난 26일 카카오 본사인 제주 스페이스닷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카카오지회 제공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가 지난 26일 카카오 본사인 제주 스페이스닷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카카오지회 제공

'판교 모델' 산업 의제도 주목…교섭 땐 한계 직면

이번 요구안은 단순한 복지 확대 요구와는 결이 다르다. IT위원회는 포괄임금제 폐지 이후에도 고용불안, 공정한 평가, 노동시간 재설계 같은 문제가 산업 전반의 공통 현안으로 남았다고 본다. 여기에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근로자가 더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를 더했다. AI 시대일수록 근로시간을 줄이는 대신 주니어급 채용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

이 주장은 판교 모델이 임금·복지 교섭을 넘어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화섬식품노조 카카오지회(크루유니언)이 지난 26일 카카오 정기 주주총회에 맞춰 진행한 기자회견도 판교 모델의 또 다른 방향을 드러냈다. 카카오지회는 제주 스페이스닷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AXZ 매각, 디케이테크인 고용불안, 카카오게임즈 매각 등을 거론하면서 "카카오가 결정하고 자회사가 실행하며 결과는 노동자가 감당하는 구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카카오 공동체 5000명 조합원의 힘을 모아 공동교섭 요구안을 만들고 사용자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주총 현장을 사실상 사용자 책임을 겨누는 교섭의 연장선으로 만든 셈이다.

카카오 사례가 보여주는 쟁점은 판교 모델의 핵심 약점과도 맞닿아 있다. IT 노조들은 이미 법인별 교섭을 하면서도 본사 수준의 기준과 책임을 요구해 왔다. 최근엔 서비스 종료, 분사, 매각, 사내독립기업(CIC) 분리 같은 경영 판단 자체를 교섭 의제로 올리고 있다.

카카오지회가 실질적 사용자 책임과 공동교섭을 동시에 꺼내 든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법적으로는 법인이 분리돼 있어도 실제 사업 방향과 고용에 미치는 영향은 그룹이 좌우한다는 문제의식이 더 선명해진 것이다. 이는 판교 모델의 동력이자 약점이 되는 고리다.

오세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 위원장이 24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서 진행된 '2026년 공동요구안 중간보고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IT위원회 제공

오세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 위원장이 24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서 진행된 '2026년 공동요구안 중간보고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IT위원회 제공

'판교 모델' 공고화…본사 겨냥한 공세 확대 '우려'

화섬식품노조 NHN지회 사례는 이 같은 흐름을 조금 더 앞서 보여준 장면으로 꼽힌다. NHN지회는 지난 4일 판교 본사 앞 결의대회에서 NHN에듀 아이엠스쿨 서비스 종료 이후 전환배치 합격률이 20% 안팎에 그쳤고 지난달 26일 3자 고용안정 협의체 참여 의사를 밝힌 다음 날 희망퇴직이 통보됐다고 주장했다.

NHN지회는 NHN이 NHN에듀 지분 약 84%를 보유한 실질적 모기업이면서도 "법인이 달라 개입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NHN지회와 연대 노조들이 꺼낸 표현은 의미심장하다. '조용한 구조조정', '책임 회피형 유체이탈 경영', '진짜 사장 나와라' 같은 표현들은 판교 모델의 투쟁 지점이 임금 인상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비스 종료와 조직 개편, 전환배치가 근로자 개인의 선택 문제로 전가되는 상황을 묵과하지 않겠단 뜻이다. 또 본사(그룹)이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법적 형식 뒤로 숨는 구조를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들 사례는 판교 모델이 공고화하고 있다는 신호다. 개별 노조가 고립되지 않고 교섭력을 키우면서 산업별 교섭이 부재한 상황에도 공동의제를 통해 노사관계 표준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 포괄임금제 폐지, 직장 내 괴롭힘 방지 대책, 복지 향상 등의 의제가 IT 업계 전반에 확산해 왔던 것도 판교 모델이 확산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결과다.

'판교 모델' 강행 땐 혼란 가중…IT 노사관계 주목

다만 사용자 책임과 조정 장치가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초기업 교섭 구도를 밀어붙이는 현실은 한계로 지적된다. 노사관계 혼란만 가중될 수 있어서다.

카카오·NHN 사례가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 사례 모두 노조가 "결정은 그룹이 하고 책임은 자회사에 넘긴다"는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어서다. IT위원회의 주 4.5일제 요구도 결국은 개별 회사 복지 차원이 아니라 산업 전반에 걸쳐 '공통 기준'을 세우려는 시도다.

판교 모델은 더 이상 일부 노조의 실험적 시도가 아니라 근로시간, 고용안정, 사용자 책임, 구조조정 대응을 한꺼번에 묶는 새로운 IT 노사관계의 문법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김대영 한경닷컴 기자 kd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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