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불법 이민자 100만 명을 추방하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 공약 실행에 속도가 붙지 않자 지난달부터 하루 3000명씩 체포하라는 지침이 내려졌다. 평소 5배에 달하는 숫자다. ICE는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불법 이민자가 일할 만한 직장을 급습하는 방식으로 공격적인 단속을 하고 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시가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해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주 방위군 300명을 투입했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으면 해병대원 700명을 추가 배치하겠다고 한다.
▷LA 한인타운에는 불안한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1992년 흑인 로드니 킹을 마구 폭행한 백인 경찰의 무죄 판결로 촉발된 LA 폭동이 트라우마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SNS에 LA 폭동 당시 한인 남성이 총기를 든 사진을 올리며 “루프톱(옥상)의 코리안을 다시 위대하게” “한인들이 옥상에 오르자 폭동이 멈췄다”고 썼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진압을 옹호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LA 한인회는 즉각 성명을 내고 “경솔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루프톱 코리안’은 LA 폭동 당시 약탈과 방화로 한인타운이 폐허가 되자 꾸려진 자경단을 뜻한다. LA 경찰이 ‘부자 백인 동네’인 베벌리힐스, 할리우드를 방어선으로 구축하며 사실상 한인타운을 포기했고 나중에 한인과 흑인 간 충돌을 방조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한인 자경단이 폭도를 막기 위해 총을 들고 옥상에 오르면서 “선제공격은 안 돼” “절대 사람한테 쏘지 마!”라고 서로 다짐하는 비장한 모습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슬픈 역사가 백인 극우 남성들 사이에서 종종 ‘밈’으로 소환돼 유색 인종 갈라치기에 쓰이고 있다.▷LA 폭동 나흘째인 1992년 5월 2일 한인 10만 명이 모여 평화 행진을 했다. 당시 자료를 보면, 한인들이 눈물 범벅인 채로 ‘평화(peace)’가 적힌 흰 띠를 머리에 두르고 장구, 꽹과리를 치며 “함께 나아가자” “평화를 원한다”고 외친다. 이민자의 서러움을 삼키고 전 재산을 잃은 미움을 녹이며 ‘화해’를 이야기하는 행진에 다양한 인종이 동참하면서 LA 폭동은 끝났다. 트럼프 주니어가 진짜 소환했어야 할 장면이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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