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테르테는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강에 버리겠다”는 공약으로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필리핀 제2의 도시인 다바오시 시장 시절 범죄 용의자 1700명을 즉결 처형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범죄를 척결했던 그다. 취임 후 공약대로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약 등 강력범죄 혐의자에 대해선 체포에 저항하면 사살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적지 않았다. 사법절차 없이 처형된 용의자가 정부 집계로만 6000여 명이다. ICC는 1만2000∼3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에선 두테르테의 초강력 리더십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범죄 소탕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ICC가 2018년 인권 유린 수사에 착수한 게 큰 위협이었다. 두테르테는 ICC 회원국 탈퇴로 맞섰고, 2022년 후임으로 선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도 수사를 막아줬다.
▷그렇게 수사를 피해 온 두테르테가 결국 체포된 건 마르코스가 방패를 거둬들인 결과다. 몇 달 전 “ICC가 두테르테를 체포할 경우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2022년 대선 때만 해도 둘은 굳건한 동맹이었다. 필리핀의 오랜 독재자의 아들인 마르코스는 퇴임 때까지 인기가 많았던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나서준 덕에 당선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이가 틀어졌다. 마르코스는 사라에게 국방장관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친미 외교를 펴 아버지의 친중 노선을 계승하려는 사라와 건건이 부딪쳤다. 급기야 여당 주도로 사라가 탄핵될 위기에 놓이자 다음 대선에서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던 두테르테는 마르코스와 정적 관계가 됐다.▷ICC에 구금된 두테르테가 어떤 처벌을 받을진 아직 불분명하다. 과거 반인권 범죄로 기소된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10년 넘게 실형을 산 전례가 있다. 필리핀에선 마르코스가 정적 제거를 위해 해외 사법기관을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냥 놔두면 큰 위협이 될 두테르테를 위해 그가 구명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두테르테에게 초법적인 범죄와의 전쟁은 대통령에 오르게 해준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내몬 양날의 칼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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