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신광영]기대수명 84.5세인데, ‘헌혈 정년’은 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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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아무리 첨단화돼도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게 사람의 피다. 우리 몸에 4000∼5000mL 정도(성인 기준) 흐르는 혈액은 회당 320∼400mL인 헌혈을 통해서만 보충할 수 있다. 피는 모자란다고 외국에서 수입할 수도 없다. 보존 기간이 며칠에 불과해 국가 간 운송이 어려울뿐더러 감염병 전파 우려 탓에 허용되지 않는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혈액의 상업적 거래를 금하고 있어 어떻게든 국내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

▷근로 정년, 계급 정년처럼 헌혈에도 정년이 있다. 현재는 만 69세다. 70세부터는 헌혈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헌혈 정년’이 1971년 처음 생길 당시엔 64세였는데 그땐 기대수명이 62.7세였다. 건강해도 나이 탓에 헌혈을 못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2009년에 헌혈 정년이 69세로 연장되기는 했지만 기대수명(84.5세)이 크게 늘어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요즘 70대 중에는 “아직 팔팔한데 왜 헌혈을 못 하게 하느냐”는 이들이 많다.

▷지금의 혈액 수급은 헌혈자를 나이 기준으로 딱 잘라 돌려보낼 만큼 한가하지 않다. 저출산으로 헌혈할 사람은 줄고, 노인이 많아져 수혈받을 사람은 늘고 있다. 헌혈 건수는 10년 전 정점(308만 건)을 찍은 뒤 차차 줄어 지난해 285만 건에 그쳤다. 2050년이 되면 헌혈은 지금보다 46% 줄고, 수혈은 39% 늘어날 것이란 전망도 있다. ‘헌혈 역군’이던 2030세대의 감소분을 5060세대가 겨우 메우는 형국인데 정년 헌혈이 이대로 유지되면 혈액 재고가 위험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정년은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장치다. 근로 정년이 있어야 청년층이 취업할 수 있고, 계급 정년이 있어야 인사 적체를 해소하고 조직 내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 그에 비해 헌혈 정년은 둬야 할 이유가 모호하다. 고령자가 헌혈하면 어지럼증이나 혈압 문제가 생길 수 있다지만 이는 나이보단 개인 건강에 달린 문제다. 오히려 헌혈이 가능한 몸을 만들기 위해 건강을 더 챙기게 되고, 헌혈할 때마다 혈액검사도 해줘 도움이 된다는 노인들이 많다. 연령과 혈액 건강의 상관관계 역시 의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다. 고령자의 피를 수혈받는다고 문제 될 건 없단 얘기다.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헌혈 정년을 두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헌혈 정년 완화를 위한 연구용역에 착수했다. 헌혈 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20∼30년 꾸준히 헌혈을 하다 나이 제한에 걸린 고령자들은 “혈액이 부족하다면서 왜 막느냐. 건강이 괜찮다는 것만 확인되면 계속 헌혈하고 싶다”며 아쉬워한다고 한다. 남의 생명을 위해 내 것을 내어주겠다는 선의에는 정년이 없는데 칼로 무 자르듯 헌혈자를 은퇴시키는 제도라면 바꿀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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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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