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 ‘아ㄹ·ㅁ답다’의 어근 ‘아ㄹ·ㅁ’은 나다움, 포용, 앎 추구 담고 있어
불교에선 분별 없는 ‘無心’일 때, “참된 아름다움에 다가가” 믿어
연민, 매일의 작업에서도 발견돼… 아름다움은 일상의 역동적 사건
아름다움에 기준이 있을까? 물건을 살 때도, 누구를 만나러 갈 때도, 심지어 나와 가족만의 공간인 집에서도 우리는 매 순간 나름의 아름다움을 선택하면서 산다. 그럼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움은 존재할까? 광활한 대자연이 주는 거대함이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 작품들은 경외감과 함께 아름다움을 준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정신 등 숭고한 아름다움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아름답다’의 옛말인 ‘아ᄅᆞᆷ답다’는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아ᄅᆞᆷ답다’의 어근 ‘아ᄅᆞᆷ’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아(我)답다’, 즉 나답다라는 가설이다. 나다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이 가설은 진실의 여부를 떠나 참으로 와 닿는 말이다. 두 번째 가설은 ‘아름드리나무’, ‘한 아름’과 같은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크고 넓은 포용이다. 세 번째 가설은 ‘앎’이란 단어에서 나왔다는 추측이다. 자각과 앎을 통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는 아름다움이 진리와 연결돼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설을 통해 나답고, 앎을 추구하고, 큰 포용을 가지는 것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 없는 상태일 때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이런 판단은 분별하려는 마음에서 나오고, 분별은 선입견이나 사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참된 세상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치다. 불교에서는 분별심 없는 마음을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무심은 무관심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려는 마음만으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세상만물의 어려움과 궁핍함을 외면하는 권력이라면 아름다움의 본질 밖에 있다. 우주적 조화로움의 관점으로 인간의 사고를 확장한다면 지구 생명에까지 아름다움과 연민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적 아름다움이다. ‘예쁘다’의 옛말인 ‘어엿브다’가 불쌍하다는 뜻을 동시에 지니는 것은 아름다움이 으뜸과 우수한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무심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든 요리를 하는 사람이든 매일 일을 하다 보면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적 감성이 조금씩 생겨난다. 매일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그것을 머리가 아닌 몸이 알게 된다. 머리와 몸이 동시에 알게 되면 만드는 사물에 담긴 세상과 통용되는 진리를 깨우치게 되고, 삶의 큰 포용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앞서 말한 ‘아름답다’는 어원의 가설과 같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플라톤은 아름다움을 경계했다. 미가 ‘이데아’라는 진리의 세계를 모방한 가짜이며 욕망을 담고 있어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이유였다. 아름다움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일까? 플라톤이 생각한 대로 아름다움이 인간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미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채우지 못할 것이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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