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美를 경계했지만… 아름다움 없는 삶은 무채색의 삶[김대균의 건축의 미래]

2 days ago 4

옛말 ‘아ㄹ·ㅁ답다’의 어근 ‘아ㄹ·ㅁ’은 나다움, 포용, 앎 추구 담고 있어
불교에선 분별 없는 ‘無心’일 때, “참된 아름다움에 다가가” 믿어
연민, 매일의 작업에서도 발견돼… 아름다움은 일상의 역동적 사건

서울 종로구 서촌에 있는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의 작업실 ‘유예소’. 이 한옥에는 장인이 오랜 세월 일을 하면서 갖게 된 미적 감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무심한 듯 정갈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서울 종로구 서촌에 있는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의 작업실 ‘유예소’. 이 한옥에는 장인이 오랜 세월 일을 하면서 갖게 된 미적 감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무심한 듯 정갈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아름다움의 기준

아름다움에 기준이 있을까? 물건을 살 때도, 누구를 만나러 갈 때도, 심지어 나와 가족만의 공간인 집에서도 우리는 매 순간 나름의 아름다움을 선택하면서 산다. 그럼 누구나 인정하는 아름다움은 존재할까? 광활한 대자연이 주는 거대함이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 작품들은 경외감과 함께 아름다움을 준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희생정신 등 숭고한 아름다움은 가슴을 저리게 한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자연과 윤리, 태도, 진리 등은 인간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아름다움을 닮고 싶은 마음을 일깨운다. 하지만 좀 더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없을까? 언어는 오랜 세월 공통으로 인정된 약속된 기호다. 다양한 언어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미(美)’는 머리에 장식을 한 사람을 표현한 글자다. 고대에서는 의식을 치를 때 제사장이 머리에 특별한 장식을 했다. 즉 ‘美’가 가지고 있는 속성은 ‘으뜸’이다. 순우리말인 ‘멋’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또 다른 단어다. 어원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멋이 ‘맛’에서 유래됐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beauty’의 어원인 라틴어 ‘bellus’는 사랑스러운, 품위 있는, 세련된, 우아한, 건전한의 뜻과 함께 ‘감칠맛 있는’이란 의미가 있다. 동서양 공통으로 ‘맛있는 것’이 ‘멋있는 것’이란 사실은 놀랍다.

‘아름답다’의 옛말인 ‘아ᄅᆞᆷ답다’는 15세기 문헌에서부터 나타난다. ‘아ᄅᆞᆷ답다’의 어근 ‘아ᄅᆞᆷ’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가설이 있다. 첫 번째는 ‘아(我)답다’, 즉 나답다라는 가설이다. 나다운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이 가설은 진실의 여부를 떠나 참으로 와 닿는 말이다. 두 번째 가설은 ‘아름드리나무’, ‘한 아름’과 같은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크고 넓은 포용이다. 세 번째 가설은 ‘앎’이란 단어에서 나왔다는 추측이다. 자각과 앎을 통해 사물을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는 아름다움이 진리와 연결돼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가설을 통해 나답고, 앎을 추구하고, 큰 포용을 가지는 것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 없는 상태일 때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이런 판단은 분별하려는 마음에서 나오고, 분별은 선입견이나 사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참된 세상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이치다. 불교에서는 분별심 없는 마음을 ‘무심(無心)’이라고 한다. 무심은 무관심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려는 마음만으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는 의미다.

세상만물의 어려움과 궁핍함을 외면하는 권력이라면 아름다움의 본질 밖에 있다. 우주적 조화로움의 관점으로 인간의 사고를 확장한다면 지구 생명에까지 아름다움과 연민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적 아름다움이다. ‘예쁘다’의 옛말인 ‘어엿브다’가 불쌍하다는 뜻을 동시에 지니는 것은 아름다움이 으뜸과 우수한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무심의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의자를 만드는 사람이든 요리를 하는 사람이든 매일 일을 하다 보면 그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적 감성이 조금씩 생겨난다. 매일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그것을 머리가 아닌 몸이 알게 된다. 머리와 몸이 동시에 알게 되면 만드는 사물에 담긴 세상과 통용되는 진리를 깨우치게 되고, 삶의 큰 포용을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앞서 말한 ‘아름답다’는 어원의 가설과 같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경계했다. 미가 ‘이데아’라는 진리의 세계를 모방한 가짜이며 욕망을 담고 있어 인간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이유였다. 아름다움은 무엇이고, 우리는 왜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것일까? 플라톤이 생각한 대로 아름다움이 인간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미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채우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삶에 위안을 주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아름다움은 삶에 위안을 주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김동규 사진작가 제공
아름다움은 나와 다른 생명과 의식 사이에서 발생하는 역동적 사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름다움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명이 없는 무채색의 삶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와 일상의 관계에 대해 “주변을 주의 깊게 둘러보세요.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으로 가득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퇴근길에 힘들고 지칠 때 우연히 거리에 핀 벚꽃을 보며, 마음에 들어오는 노래 가사를 느끼며, 아이의 미소를 보며 순간 삶의 위안을 얻는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이 없다면 삶의 위안이나 의미 역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대균 건축가·착착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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