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초기 골든타임을 지혜롭게 보내는 법[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3 weeks ago 9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나는 몇 년 전 연말 임원 인사 시기에 회사를 떠났다.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인지 막상 통보를 받고 나서는 오히려 담담했다. 한가로운 아침을 보내고 낯선 여행지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간만의 여유를 즐겼다.

한두 달이나 지났을까. 조금씩 움직여 보려 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일단은 채용하는 곳이 몇 곳 없었고 그나마 이력서를 내봐도 아무런 답을 받지 못했다. 서서히 애가 타들어 갔다. 퇴직 후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심각한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병원 신세를 진 게 그즈음이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프고 방황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조언해 줬다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 것 같다. 만약 회사를 떠난 뒤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퇴직자가 있다면 다음 세 가지를 해보시길 바란다.

첫째, 지난 시간의 흔적을 정리하자. 퇴직 후에 나는 휴대전화를 종일 들여다봤다. 모든 연락이 끊긴 지 오래인데도 혹시나 하고 버릇처럼 확인했다. 아무 반응 없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란 사람이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잊혀지고 있다는 두려움은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그야말로 매일이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어느 순간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었다. 더는 의미 없는 지난날과 결별하기로 했다. 퇴직 후 연락 끊긴 사람들의 전화번호부터 지웠다. 수백 개의 연락처가 수십 개로 줄어드는 데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는 김에 회사 일정을 담은 다이어리, 교육 때 받은 자료집까지 모두 버렸다. 눈앞의 복잡한 것들을 치우자 머릿속이 덩달아 가벼워졌다. 지금 내가 가진 것들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제야 비로소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둘째, 나만의 일과표를 만들어 보자. 퇴직 초반의 내 생활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눈을 뜨는 게 기상 시간이었고, 배고프면 그때가 식사 시간이었다. 날짜 개념도 사라져 오늘이 며칠인지조차 헷갈렸다. 컨디션은 갈수록 나빠졌고 만사가 귀찮았다. 수십 년을 규칙적으로 살아왔건만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치할 수 없었다. 우선 딱 한 가지만 실천해 보기로 했다. 오전 7시에 알람이 울리면 곧바로 세수하기. 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이었다. 그러자 내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정된 습관을 만들고 나니 망가졌던 리듬이 되살아났다. 하루를 여는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몸도 가벼워졌다. 아침의 기운을 이어가고 싶어 가볍게 운동을 병행한 덕분이었다. 놀랍게도 사소한 행동 하나에는 무기력한 일상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후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셋째, 큰 계획보다 오늘의 작은 할 일을 정하자. 퇴직 후 내 포부는 그야말로 원대했다. 컨설턴트, 최고경영자(CEO) 등 남들 눈에 멋져 보일 만한 명함을 떠올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팀원들과 함께 일했던 내가 직접 실무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간단한 제안서를 완성하는 작업도, 관공서에 문의 전화를 하는 과정도 모조리 서툴렀다. 부족한 실력 탓에 결과는 늘 실패였다. 그로 인해 퇴직 후 패배감과 좌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도무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체 왜 번번이 벽에 부딪히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다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뜻밖에도 이 행동은 훗날 대반전의 계기가 됐다. 당시에 쓴 글 한 편이 단초가 돼 수많은 길과 연결된 것이다.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무리한 목표는 부담만 키우고 자기 자신을 지치게 할 뿐이었다. 간절한 바람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위대한 계획이 아닌 묵묵히 내딛는 한 걸음이었다.

의외로 많은 퇴직자들이 퇴직 후 초기 몇 달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다. 나 역시 그랬다. 돌아보면 그 시기는 얼마간 흘려보내도 되는 날들처럼 보이지만 내 삶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 과거와 선을 긋고 앞으로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후반부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한번 가버리고 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퇴직은 멈춤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다. 따라서 퇴직 초기에 해야 할 일은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너무 느긋해서도, 반면에 지나치게 조급해서도 안 된다. 흐트러진 일상이 그대로 굳어지거나 혹은 무턱대고 나섰다가 넘어지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내일을 바꾸고 싶다면 오늘을 성심껏 살아보자. 퇴직 후 진짜 인생은 바로 지금의 ‘작은 실천’ 위에 세워진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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