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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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

역사적으로 권력자들은 물속에서 많은 것을 결정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과거 헝가리에선 온천이 총독과 고위 관료의 비공식 회의장이었다고 한다. 수건 한 장 걸친 채로는 서로 무기도, 권위도 없기 때문일까. 19세기 미국 뉴욕의 이민자 이야기를 그린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선 총칼을 휘두르던 갱단 두목들이 튀르키예식 목욕탕에서 밀담을 나누고, 미국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에선 주인공 프랭크 언더우드 대통령이 러시아식 사우나(Banya)에서 러시아 대통령과 협상을 벌인다. 어릴 적 죽마고우과 서로 등을 밀어주며 가까워진 기억을 떠올리면 이해도 간다. 피차 동등한 모습에 솔직한 대화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우리나라에도 한때는 그런 ‘목욕탕 정치’가 있었다. 국회 의원회관 지하 2층에는 의원만 입장 가능한 목욕탕이 있다. 하루 일과를 탕 속에서 시작하는 의원도 꽤 있다. “국회의원은 당(黨)은 달라도 탕(湯)은 같이 쓴다. 그래서 여야 의원이 탕 속에 들어가 있으면 ‘한 탕 속’이 되는 것이다.” 2004년 이계진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자신의 블로그에 적은 말이다. 한 여당 원로 정치인도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십수 년 전 국회 목욕탕의 추억을 털어놨다. 그는 “여야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난타전을 벌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탕에서만큼은 친구였다”고 했다. 당시 함께하던 야당 정치인의 이름을 일일이 읊으며 잠시 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는 그래도 낭만이 있었지”라는 말과 함께.

[토요칼럼] 국회 목욕탕의 TV채널 싸움

2009년 국회에서는 아예 ‘목욕당(沐浴黨)’이라는 초당적 모임까지 만들어졌다. 탕에서라도 여야 간 대화의 물꼬를 터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져 47명이나 되는 의원이 가입했다. ‘냉온탕 교류 위원장’ ‘수면실장’ 같은 익살스러운 직책도 만들었을 정도니, 삭막해진 지금 정치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던 것 같다.

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 이후 펼쳐진 정치권의 극한 대치는 그나마 숨통을 트던 공간조차 전장(戰場)으로 바꿔놓았다. 지난 11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원내대책회의에서 일부 방송국의 편향성을 지적하며 목욕탕 사례를 들었다. 그는 “국회에 의원들 목욕탕이 있는데, 과거엔 여야가 선호하는 방송이 차이가 있기 때문에 YTN이나 연합뉴스TV를 틀어놓는 것을 묵시적 관행으로 삼았다. 그런데 요즘은 가보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많아서 그런지 맨날 MBC만 틀어놓는다. 오늘 아침에도 MBC를 연합뉴스TV로 바꿔놨다”고 토로했다. 그러자 이광희 민주당 의원은 곧바로 페이스북에 권 원내대표를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국회의원 목욕탕에서 일찍 오는 의원 중 하나라서 맨날 MBC 틀어놓은 사람이 바로 접니다. 누군지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뒤에서 이야기하는 찌질함이라니”라고.

이렇다 보니 ‘물밑 대화’는 사라지고 전면전만 남았다. 과거 정치권에선 중요한 회담이 잡히면 먼저 실무급에서 협상 방향을 조율한 뒤 만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요즘은 미리 조율한 사항이 뒤집어지기 일쑤고, 대부분의 협상 및 결렬 과정은 실시간 중계된다. 최근 추가경정예산 등 민생 현안 해결을 위해 개최한 세 차례 여야 국정협의회도 사실상 빈손으로 끝났다. 양당 모두 회의 직후 ‘백브리핑’(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상대 당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은 “예전에는 당 대표끼리는 싸우더라도, 원내 지도부 간엔 과도한 비난을 자제하고 뒤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며 “갈수록 대화는 줄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고위급끼리 만나 모든 걸 한 번에 해결하려고 하니 평행선만 달리지 않겠느냐”고 했다. 정치인 간 텔레그램 대화나 고위급의 비공개 논의가 대부분 생중계 되는 상황에서 ‘물밑 협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우리가 정치에 바라는 ‘투명성’이 이런 종류는 아닐 것이다. 국민 대다수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싸움을 멈추고 갈등을 풀어내는 역할을 해주기 바랄 것이다. 적어도 의원들이 목욕탕 내 TV 채널을 두고 설전하는 모습을 보려고 투표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물밑에서 각자의 이해관계를 눈감아주라는 얘기가 아니다. 서로 생채기를 내는 것만이 지상 과제가 된 요즘 정치권이지만, ‘목욕탕의 미덕’을 한번쯤 떠올려봤으면 한다. 긴장을 풀고 나누는 가벼운 대화가 꼬일 대로 꼬여버린 정치의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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