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당시 독일 총통은 과거 독일의 수모를 그대로 갚아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같은 장소에 같은 기차까지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박물관에 전시해 두었던 기차를 끌고 왔다.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폴 레노 프랑스 총리로부터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프랑스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대단한 나라가 한순간에 무너진 것도 그렇지만, 마지노선이 돌파당한 뒤로 프랑스 정치인들의 패배주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프랑스 본토가 함락당한다고 해도, 북아프리카에만 45만의 프랑스군 병력과 함대가 남아 있었다. 특히 알제리는 외인부대의 본부가 있을 정도로 제2의 군사거점이었다.
나중 일이지만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도 프랑스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처칠은 프랑스가 망명정부를 세우고 충분히 저항을 지속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프랑스 지도층은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레노는 은퇴한 84세의 필리프 페탱에게 정부를 넘겼다. 페탱은 1차대전 때 프랑스를 구한 전쟁 영웅이었지만, 이때는 항복을 지지하는 인사들로 신속하게 새 내각을 구성했다. 마지막 순간에 처칠은 프랑스 고위 인사를 탈출시키기 위해 30명을 태울 수 있는 비행정을 급파했는데, 그 비행정도 텅 빈 채로 돌아왔다.페탱의 노욕, 통치자와 관료의 비겁함이 프랑스의 수치를 만들었다. 권력자에게 제1의 조건은 책임감이다. 진정한 용기는 타고난 담력이 아니라 책임감에서 나온다.
임용한 역사학자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