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반도체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최신 제품(HBM3E 12단) 양산 계획을 공개한 건 지난해 9월 대만에서 열린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전시회 ‘세미콘 타이완’에서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2027년에 10나노 미만 D램을 출시하겠다”고 발표한 장소도 같은 곳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기업이 ‘TSMC의 나라’에서 핵심 기업 정보를 공개한 것이다. 시장에 영향을 주는 민감 정보인 만큼 곧바로 전 세계에 퍼졌고, 관련 기업 주가는 요동쳤다. 마이크론, 구글, 엔비디아, 브로드컴 등 세계 최고 반도체기업들의 거물급 인사들도 이 행사에서 의미 있는 얘기를 쏟아냈다. 그렇게 대만은 ‘신(新) 반도체 수도’가 됐다.
그때 대만에서 했던 행사가 지난 19일부터 한국에서 열리고 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세미콘 코리아 2025’다. 세미콘 행사는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주관으로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매년 열린다.
하지만 행사장 분위기는 대만과 영 딴판이었다. ‘빅샷’이라곤 기조연설에 나선 송재혁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CTO)(사장) 정도였다. 그나마 귀에 쏙 들어오는 ‘뉴스’ 없이 원론적인 얘기에 그쳤다. AMD,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등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세미콘 타이완을 찾은 글로벌 ‘반도체맨’들이 TSMC 등 대만의 기술력을 치켜세우며 “함께하자”고 ‘러브콜’을 보낸 장면은 코엑스에선 연출되지 않았다.
국내 반도체업계 사람들은 “반도체 시장의 ‘뜨는 별’ 대만과 요 몇 년 새 한껏 쪼그라든 한국의 위상이 두 행사에 그대로 담겨 있다”고 말한다. 대만 정부와 정치권은 반도체 기업들을 위해서라면 간도 빼줄 태세지만, 우리는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에 한해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를 허용하는 반도체특별법마저 표류하고 있어서다.
이런 분위기는 행사장에서도 감자됐다. 세미콘 타이완에는 한국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행정원장이 참석했지만, 올해 세미콘 코리아를 찾은 최고위급 정부 인사는 국장급이었다.
반도체산업은 이제 나라마다 보조금을 쏟아붓고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등 ‘국가 대항전’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래야 미래 첨단기술 패권 경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벌 국가들은 정부와 정치권, 기업이 ‘원팀’이 돼 뛰고 있는데, 우리만 기업에 모든 숙제를 떠넘기고 있다. ‘코리아 원팀’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