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멜로무비’ ‘슬기로울 전공의생활’ ‘대환장 기안장’ ‘흙심인대호’….
최근 화제가 된 콘텐츠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극적이지 않은 ‘무해’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숏폼으로 대표되는 도파민에 지친 소비자들의 관심이 무자극 콘텐츠로 향하고 있다. 콘텐츠뿐만 아니다. 최근 핫플레이스를 점령한 ‘가차숍’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무해한 장소로 통한다. 가차숍의 가차는 ‘찰캉찰캉’이라는 뜻의 일본어 ‘가차가차(ガチャガチャ)’에서 유래한 단어다. 캡슐토이를 뽑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릴 때 철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 것을 표현한 이름이다. 한 손에 쥐어지는 캡슐 안에는 미니 피규어, 인형, 문구류 등 다양한 장난감이 담겨 있다.
순수함에 매료되는 2030
귀엽고 순수한 것, 자극적이지 않고 무해한 것에 시간을 쓰고 지갑을 여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왜 무해함에 열광하는가. 2030세대 사이에서 불고 있는 ‘캐치! 티니핑’ 열풍도 무해력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4∼6세 아동 사이에서 인기를 얻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어른이’(어른+어린이)들도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캐치! 티니핑에는 똑똑핑, 화나핑, 하츄핑, 포실핑 등 다양한 모습과 능력을 가진 요정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 종류만 100가지가 넘는다. 많은 아이들이 티니핑 인형이나 완구를 모으는 걸 좋아해 부모들 사이에서 ‘파산핑’으로 불리기도 했다. 너무 많은 완구를 사주다 보니 지갑이 가벼워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2030세대를 중심으로 자신을 이 티니핑 캐릭터에 빗대 ‘OO핑’이라고 지칭하는 현상이 ‘밈(meme)’으로 자리 잡았다. 절약하는 소비 습관을 자랑하는 이는 스스로를 ‘절약핑’으로, 반대로 갖고 싶은 명품을 샀을 때는 ‘탕진핑’ 등으로 부르는 식이다. 젊은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야근핑’ ‘출장핑’ ‘피곤핑’ 등도 있다.
갈등 시대 나름의 생존방식
이 같은 현상은 왜 나타날까? 우선 높아진 디지털 피로도를 지적하고 싶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각종 신기술은 익숙하던 생활과 결별하게 만든다. 각종 플랫폼과 디바이스마다 정보가 과도하게 넘쳐나면서 지금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의심이 늘어만 간다. 매일매일 접하는 콘텐츠는 깜짝 놀랄 만큼 자극적이다. 이 디지털 피로를 달래줄 저자극의 해 없는 물건과 콘텐츠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 사회의 갈등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도 사람들이 무해한 존재를 찾는 이유다. 최근 신조어 중에 ‘긁힌다’는 표현이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을 부정당했거나 자존심이 상했을 때 긁혔다고 표현한다. 세대·빈부 격차가 크게 악화됐고, 고질적인 정치적 이념 대립 강도는 더 세지고 있다. 넓게 보면 한국 사회가 ‘긁힌 사회’가 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긁힌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무해한 그 무엇, 또는 긁어도 상처를 내지 않고 삶의 가려움을 가라앉혀 줄 그 무엇이 필요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지금 한국 사회가 무해함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자극이 난무하고 서로를 향한 날이 서 있는 갈등의 시대여서일 것이다. 나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생각을 정화해주는 존재에 대한 갈구다. 어쩌면 무해함을 찾는 현상은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는 새로운 생존방식일 수 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