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자타가 공인하는 ‘공급망의 화신(化身)’이다. 천재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이라는 세상에 없던 제품을 내놨다면, 쿡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해 애플을 정보기술(IT) 제국으로 키웠다.
재고를 ‘악(惡)’으로 규정하고 공급사에 단 1센트의 원가까지 쥐어짜던 그가 최근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과 한 인터뷰에서 최근 6개월 가격 변동에 대해 “이것은 100년 만에 한 번 있을 법한 대홍수”라고 했다. IBM과 컴팩, 애플까지 40년 넘게 업계에 몸담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쿡을 당황하게 한 정체는 메모리 반도체 품귀가 촉발한 ‘멤플레이션(memflation)’이다. 메모리와 인플레이션의 합성어로 D램과 낸드 가격 급등이 스마트폰과 PC, 노트북 등 IT 기기 가격을 끌어올리는 현상을 뜻한다.
그동안 애플은 IT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다. 삼성전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AI 광풍은 이 ‘갑을 관계’마저 흔들었다. 빅테크 공룡이 메모리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자 가격이 1년 새 네 배로 폭등한 것이다. 선급금을 걸고 메모리를 기다리는 빅테크에 밀려 애플마저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야 하는 처지가 됐다.
그 결과 차기 아이폰 프로 가격이 270달러 이상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에서도 200만원대 아이폰 시대가 현실이 될 수 있다. 노트북, PC도 예외가 아니다.
그간 반도체업계의 상식은 ‘메모리는 싸진다’는 것이었다. 과거 삼성전자가 제시한 ‘황의 법칙’에 따라 메모리 집적도는 매년 두 배씩 커졌다. 소비자에게 이는 곧 ‘같은 돈으로 더 많은 저장공간을 누린다’는 의미였다. AI 시대 도래와 함께 그 상식은 깨졌다.
산업혁명기에는 석탄이 공장을 돌렸다. 20세기 세계 경제를 움직인 혈액은 석유였다. 기름값이 오르자 자동차와 가전, 식품 가격까지 줄줄이 뛰었다. AI 시대에는 메모리가 데이터를 움직이며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쿡도 못 피한 메모리 대홍수이자, 새로운 자원 파동의 서막이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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