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융사 대표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에 대해 이런 말을 내뱉었다. “밤길 가다 마주치면 정말이지 실컷 패주고 싶다.” 사석에서 이 원장이 대화 소재로 등장하자 씩씩거리며 한 말인데, 웃음이 나오면서도 얼마나 분통 터지면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 출신에게 금융감독 수장을 맡긴 이유가 ‘금융 카르텔을 깨라는 것이었다’ ‘라임사태 정치적 배후를 끝까지 캐라는 것이었다’는 등의 설이 돌았지만 이 원장 임기가 3개월도 남지 않은 지금에도 “도대체 왜?”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지난 3년간 검사의 결기로 시장 때려잡기에 나선 것 말고는 한 게 뭐가 있냐는 불만이 금융사에 가득하다.
금감원 존재의 이유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신용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는 금융업이 도덕적 해이 없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감시하고 감독하는 역할이다. 단 금융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라고 법에 명확히 명시돼 있다. 역대 금감원장들이 첫 일성으로 “금융사에 군림하는 기관이 아닌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겠다”고 외친 이유다.
금감원의 예산 대부분을 금융사가 갹출하는 감독분담금으로 충당하게 한 것도 서비스를 제대로 하라는 취지에서다. 그런 금감원은 올해도 금융사들로부터 감독분담금으로 3300억원 이상을 걷는다. 하지만 지금 금융사들 입장에선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기는커녕 수시로 골목대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는 기분일 것이다.
금감원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9년 출범한 이후 시장 서비스 기관이라는 본분을 자주 망각했다. 특히 이른바 정권 실세가 원장으로 갈 때마다 시장 위에 군림하려는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권 입장에서도 뒷짐 진 채 정책을 펴는 금융위원회보다 시장을 상대로 직접 칼을 휘두르는 금감원을 장악하고 싶은 유혹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진보 정부든, 보수 정부든 마찬가지다. 굳이 이름을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금감위원장-금감원장 겸직이 해제된 2008년 후 금감원장은 주로 친정권 낙하산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문재인 정부 때 금감원장의 권한 남용은 도를 넘었다. 한 달 만에 물러난 김기식 원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윤석헌 원장이 그랬다. 금감원에 대한 지휘 감독권을 가진 금융위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해 친분 있는 학자들을 내세워 금융위 폐지론까지 들고나왔다. 그나마 당시엔 힘이 센 재무관료 출신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버티고 있었다.
윤석열 정부 들어 검사 출신 원장이 나오면서 금융위는 무기력 그 자체였다. 금융위-금감원 체제 16년간 이렇게 뒤틀리고 이상한 동거 체제는 본 적이 없다. 과거 금감원장이 제아무리 목소리가 크더라도 금융위가 정해놓은 정책 테두리 내에서 집행기관으로서 역할에 충실하려는 시늉이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 금감원은 입법 권한도 없으면서 시시때때로 법에 관여하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상법 개정안에 대해 직을 걸고 정부 거부권을 막겠다는 이 원장의 돌출 행동에도 금융위원장은 물론 경제부총리조차 제어를 못 하고 있다. 전직 금융관료는 “통제되지 않은 권력이 날뛰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금감원이 통제되지 않은 권력에 맛을 들인 이상 본연의 역할로 복원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각에선 과거 외환위기 때 금감위원장이 감독원장을 겸직하던 시절로 회귀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당시 감독당국이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하던 비상시국과 지금은 다르다. 또 당시 금감위원장들이 금감원을 직접 거느리며 칼을 휘두르는 맛을 본 만큼 스스로 금감원의 조직과 기능을 비대화한 원죄가 있긴 하다.
금융감독체계의 전면 재수술이 필요하지만 체계 문제로 접근하면 백가쟁명이요, 하세월이다. 현행 시스템 아래 운용의 묘만 살려도 방법은 있다. 금감원장 역할을 법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금융위원회법(금융위 설치 등에 관한 법률) 4조에 있는 위원회 구성 멤버에서 금감원장을 제외하면 된다. 위원회는 일종의 판결 기관인데, 금감원장은 검사와 판사 기능을 동시에 하면서 무소불위의 칼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또 하나, 금융위는 금감원에 대한 지휘 감독권(금융위법 18조)을 가지고 있는 만큼 금융위원장에게 금감원장에 대한 징계 요구권을 부여하는 것도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