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는 것으로야 집도 있고 문장도 있고 곡도 있겠지만
지으면 곧 사라지는 것이 저녁 아니겠나
사라질 것을 짓는 일이야말로 일생을 걸어볼 만한 사업이지소멸을 짓는 일은 적어도 하늘의 일에 속하는 거니까
사람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매일같이 연습해본다는 거니까멸하는 것 가운데 뜨신 공깃밥을 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이 지상의 습관처럼 지극한 것도 없지
공깃밥이라는 말 좋지
무한을 식량으로
온 세상에 그득한 공기로 짓는 밥
저녁 짓는 일로 나는 내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짓는 걸 허물고 허물면서 짓는
저녁의 이름으로
―손택수(1970∼ )
남편이 은퇴를 준비한다. 세상에서 지워질 일만 남았다. 결국 무에서 왔으니 무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남편은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고 준비한다. 그의 말을 통해 나는 가르침을 얻었다. 새로운 것을 알려주는 이는 모두 나의 스승이다.
남편의 말에 내 스승이 살듯 이 시 속에도 나의 스승이 살고 있다. 짓는 것 중에 으뜸은 저녁이라는 말. 덕분에 나의 부엌일은 으뜸의 가치를 얻었다. 소멸을 짓는 것은 일생을 걸 사업이라는 말. 덕분에 놓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일생의 대사업이 되었다. 공깃밥을 안고 기다리는 일은 지극하다는 말. 덕분에 오지 않는 식구를 기다리는 일은 짜증이 아니라 정성이 된다.
시인은 저녁 짓는 일로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한다. 정성껏 소멸을 연습하면서, 잘 지워지면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말이다. 덕분에 나는 남편의 은퇴와 소멸의 무서움에 직면할 용기가 생겼다. 잘 얻었으면 잘 잃어야지, 잘 잃었으면 잘 얻어야지. 그 사이에 시가 있고, 사람이 있고, 인생이 있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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