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개발(R&D) 예산의 복원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그러나 '묻지 마 복원'은 무차별 삭감만큼이나 위험하다. 인공지능(AI) 육성을 위해 100조원 규모의 모태펀드를 조성하겠다는 공약이 정책화 되고 있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이다. 민간기업 출신 장관과 수석비서관이 공무원 조직문화를 이해하고, 설득하거나 장악해서 개선할 수 있을지는 향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한 번에 다 할 수 없다는 논리로 흐지부지될 수도 있다. 정확한 처방을 위해 문제점 진단부터 다시 해보자.
첫째, 예산 삭감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의 요청을 받은 '기획예산처'가 예산금액을 일방적으로 정한 뒤 각 부처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 협의나 조율 과정은 생략되었으며, 이는 정부 부처의 '갑'으로 불리는 기획예산처가 평소에 해오던 방식보다 더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이는 대통령과 정부 부처간 상명하복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모든 정책이 이렇게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부처의 실책이나 명분부족 등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이런 방식이 적용된다. 삭감이 일방적이었던 만큼 복원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련 부처가 예산을 획일적으로 삭감했다는 점이다. R&D 예산에는 장기·단기 과제, 기초·응용 연구, 초기·마무리 단계 등 다양한 유형이 혼재해 있다. 성과가 탁월한 과제도 있지만, 성과가 미진하거나 구조적 문제를 가진 과제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동일한 비율로 삭감한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리고 획일적인 복원은 더욱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셋째, 삭감 과정에서 제도적 조정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과정을 걸러낼 역할을 해야 할 부처, 기획재정부, 대통령실 등 어디에서도 실질적인 조정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정치적 판단이나 시간 제약이 있었을 수는 있으나, 대세에 편승해 일이 과속으로 진행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형식만 있는 평가' '머리에만 있는 차등 원칙' 등 공공행정의 전형적인 문제를 다시 드러낸다. 예산이 과도하게 삭감된 연구자나 기관이 이의를 제기할 경우, 담당자가 이를 논리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꺼리거나 부담스러워하는 현실도 일조한다.
넷째, 모태펀드나 컨소시엄 방식에서 나타나는 정치·경제적 로비스트 구조다. 실제로 연구는 하지 않으면서 과제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영업대행사'들이 존재한다. 과제 규모가 크다 보니, 연구자 입장에서는 일부 금액을 상납(?)하더라도 선정되는 것이 중요해 필요악으로 인식되곤 한다. 문제는 여기에 자금이 필요한 집권 여당 주변 인사들이 얽히면서 구조가 더욱 혼탁해진다는 점이다. 앞으로 큰 예산 편성이 예고된 만큼, 이미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러한 패턴이 개선되지 않으면, 향후 증액된 R&D 예산 역시 동일한 문제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급하게 삭감한 예산을 급하게 되살리는 데 따르는 가장 큰 위험은 시행착오의 반복이다. 예산을 삭감할 때는 거센 원성이 쏟아지지만, 복원한다고 고마움을 표하는 이는 드물다. 그 결과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현장에서는 불신과 원망 속에서 예산이 집행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제는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을 넘어서,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밀하게 설명하고 새로운 시스템으로 접근할 시점이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다. 하고 싶은가? 덜 하고 싶은가? 그리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 세 가지가 남은 과제일 뿐이다.
임성은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前 서울기술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