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우연히 길을 걷다 한 지인을 만났다. 멀리서 봐도 단번에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갔지만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했다. 분명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데 행색이 이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옷매무새가 신경 쓰였다. 늘 단정한 셔츠 차림이었던 이가 구깃구깃한 조끼를 걸치고 있어 무척이나 어색했다. 순간 그의 나이가 떠올랐다. 올해로 오십 중반을 훌쩍 넘겼으니 어쩌면 회사를 그만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금했지만 대놓고 묻기는 조심스러워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운을 뗐다. “임금피크제 들어갔어요.”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회사는 임금피크제 시기가 되면 기존 보직에서 물러나 새로운 업무를 맡는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전과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제야 그의 복장이 바뀐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당황하여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쉽사리 생각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한 이에게 직급과 직책이란 그저 명함 속 타이틀만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쏟아부은 땀과 열정, 조직에서 지나온 날들을 설명해 주는 증표와 다름없었다. 그런 자리를 뒤로하고 낯선 업무를 해야 한다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게 뻔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몸은 조금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다며 환하게 웃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그래서인지 헤어진 다음에도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편안하긴 한 걸까. 애써 태연한 척 웃음 지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때 짚이는 게 있었다. 그를 처음 소개받았을 때, 그에게 아픈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른이 돼서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고 했다. 그의 휴가는 항상 아이의 정기검진일에 맞춰져 있었고, 병원비도 적잖이 든다고 하였다. 스치듯 접한 얘기였지만 당시 같은 부모 입장에서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었다. 이어 그런 생각도 스쳤다. 혹시 회사에 남기로 한 그의 결정에 아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을까. 계속 근무하면 안정적으로 건강보험을 유지할 수 있고, 치료비 지원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언젠가 비슷한 상황의 선배에게서 퇴직 후 제일 아쉬웠던 점이 회사 보험과 사내 복지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그리 ...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는 또 다른 이유[정경아의 퇴직생활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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