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담박하게 살아왔으니, 닭 한 마리 없어졌다고 아이야, 그리 애태울 것 없다.집집마다 놀고 있는 솥과 아궁이가 있으니, 삶든 볶든 제 마음이지.국을 끓여 먹는 자에겐 구운 떡 세 개 보태 주고, 지져 볶아 먹는 자에겐 후추 한 줌 보태 주어라.도리어 내가 주인 노릇하며 대접할 일 덜었고, 아침 내내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도 없어졌으니, 해 높이 뜨도록 자면 되겠구나.(平生淡薄, 雞兒不見, 童子休焦. 家家都有閒鍋灶, 任意烹炮. 煮湯的貼他三枚火燒, 穿炒的助他一把胡椒.倒省了我開東道, 免終朝報曉, 直睡到日頭高.)―‘만정방·잃어버린 닭(滿庭芳·失鷄)’ 왕반(王磐·약 1470∼1530)세상에 별 계산법도 다 있다. 닭을 잃었는데 주인은 오히려 느긋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화부터 낼 일이건만, 왕반은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에게 걱정 말라 타이른다. 그의 상상은 엉뚱하다. 닭을 훔쳐 간 사람이 지금쯤 삶을지 볶을지 상상하더니, 국이면 떡을 보태고 볶음이면 후추까지 얹어 주라고 농담한다. 자기 닭이 남의 솥에 들어간 판인데 원망 대신 양념 걱정이다. 물론 도둑질을 두둔하는 말은 아니다. 이미 잃은 닭 때문에 마음까지 잃지는 말자는 이야기다. 살다 보면 누구나 돈이든 체면이든 기회든 무엇인가를 잃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붙들고 뒤척일 것인가, 웃으며 생각을 바꿀 것인가. 이 와중에도 그는 태평하다. 닭이 없어졌으니 손님 접대할 수고를 덜었고, 새벽마다 잠 깨울 소리도 사라졌다. 해 높이 뜰 때까지 푹 자면 그만이다. 때로 잃어버린 닭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래도 잠은 푹 잘 수 있지 않은가.’ ‘만정방’은 곡조명이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좋아요 0개 슬퍼요 0개 화나요 0개 지금 뜨는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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