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다. 진로를 선택할 때마다 글쓰기는 전공과 직업으로 치환돼 나에게 가치와 이익을 안겨줄 좋은 전망이어야 했다. 좋아하는 마음과 좋은 전망. 안팎으로 가능성을 점쳐보다가 모든 가능성을 포기했다. 내가 글을 써야 할 충분한 이유가 없었다.
장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의 반대와 애매한 재능과 취약한 마음가짐으로 나는 장래 희망을 바꿔갔다. 번번이 떨어지는 공모전 대신 수능 공부에 전념했고, 취업이 어렵다는 문예창작과는 지원하지 못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작가’는 공란으로 지웠다. 교사와 기자, PD와 같은 ‘작가’를 비켜간 직업을 장래 희망란에 적었다. 일과를 마친 밤에야 몰래 글을 쓰는 ‘키친테이블라이터’로 오래 지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특강 과제로 멘토를 찾아가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중년의 다큐멘터리 PD였던 멘토가 내게 물었다. 학생은 꿈이 뭐냐고. 그의 반짝이는 눈 때문이었을까. 이상한 대답이 나왔다. “저는 글을 쓰고 싶어요.”사실 스펙을 쌓으며 대기업에 수십 통의 자기소개서를 내고 있던 나로서는 충동적인 대답이었다. 이 한마디가 뭐라고 소리 내 말하기조차 어려웠을까. PD가 활짝 웃었다. “멋지네요. 이제 글을 쓰면 됩니다.” 단순하고도 단단한 긍정이었다.
“글쓰기는 업(業)의 영역이라기보단 삶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글을 쓰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자기 이해가 우선이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를 이해하려면 자기 삶을 써봐야 합니다. 계속 쓰세요. 공개적으로 쓰세요. 글쓰기로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진 아무도 모르니까요. 계속 쓰면 뭔가는 달라질 겁니다.”
이후로 용기 내 공개적으로 글을 썼다. 계속 글을 쓰자 댓글이 달리고 독자가 생기고 기회가 찾아왔다. 첫 책을 낸 건 7년이나 지나서였지만, 한때 내게로만 침잠했던 글은 어느새 사람과 세상을 향해 갔다. 글쓰기에 진지했기에 그만큼 두려웠단 걸 뒤늦게 알았다. 나에겐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용기와 지지가 필요했다. “저는 글을 쓰고 싶어요.” 작가인 내게 사람들은 말한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과 이미 늦었다는 좌절감을 품었지만 그래도 글쓰기를 희망한다. 글쓰기의 첫 단어가 ‘용기’라면 마지막 단어는 ‘계속’이라고 생각한다. 용기와 계속을 연결하는 내가 아는 유일한 단어는 ‘다시’. 몇 번이고 다시, 글을 쓰면 된다. 자기 자신이 될 때까지, 다른 삶을 이해할 때까지. 나만은 당신 장래의 희망을 힘껏 긍정한다. “멋지네요. 이제 글을 쓰면 됩니다.”고수리 에세이스트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