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과거에서 보내는 엽서] [85] ‘위험한 정사’가 남긴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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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8년 9월 24일 토요일, 명동 코리아극장 앞에서 에로틱 스릴러 영화 ‘위험한 정사’의 간판 그림을 올려다보고 있다. 추석 연휴는 추석 당일인 내일 25일과 26일 월요일이다. 법정 추석 연휴가 3일로 확대된 것은 1989년부터다. 그런데 코리아극장 주변에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위험한 정사’가 UIP(United International Pictures)의 첫 한국 직배 영화이고, 이제 엄청난 자본과 대중성을 갖춘 할리우드 영화들이 미국 배급사에 의해 몰려들면 열악한 한국 영화의 제작 기반이 파멸할 거라며 한국 영화계가 극렬 저항(나중에는 상영 극장 안에 뱀까지 풀어 놓으며)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위험한 정사’는 이 ‘난리 블루스’ 끝에도 상영됐으며 워너 브라더스, 20세기 폭스 등 할리우드 직배사의 한국 영화 시장 진출로 이어진다. ‘UIP 직배 파동’ 는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외세 저항 분쟁이었고 ‘스크린 쿼터제(한국 영화 의무 상영 일수)’를 사수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환됐다. 당연히 한국 영화는 1993년 시장점유율이 15.9%까지 떨어지는 등 침체가 있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역설’ 또한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영화계는 다방면에서 체질을 개혁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르네상스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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