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의 넥스트 거버넌스] 〈22〉정권교체를 넘어 국가 운영체제의 업그레이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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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사진 한 장이 마음에 남았다.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 대통령이 두 기업 총수 앞에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언론은 이를 파격의 예우라 불렀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다른 장면이 겹쳐 보였다. 정권마다 반복된 국가 권력과 자본의 관계였다. 대한민국이라는 앨범에 쉽게 넘기지 못할 사진 한 장이 또 추가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남에 대규모 반도체 팹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기업의 투자 계획을 정부가 먼저 발표했고, 이후 기업 공시가 나왔지만 정정 공시가 이어지면서 입지와 일정, 실행 가능성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됐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결정이라면 치밀한 검증과 공론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정치가 방향을 제시하고, 정부가 발표하고, 기업이 호응했으며, 전문가는 뒤로 물러나고, 공론장은 비어 있는 듯했다. 이 패턴은 특정 정권의 풍경이 아니다. 어느덧 대한민국 국가 운영의 깊은 층위에 스며든 오래된 관성으로 굳어져 왔다.

시야를 넓혀 보자. 정부 수립 이후 80년 가까이 대한민국에는 여러 대통령이 거쳐 갔다. 그 이어달리기 속에서 국가는 시장을 만들고, 정치는 자본을 배분했다. 그 결과 산업화의 영광과 민주화의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국가 운영체제의 고착화가 진행됐다. 성공한 체제일수록 스스로를 바꿀 이유를 찾지 못한다. 과거의 성공은 오히려 변화를 늦추는 힘으로 작용했다. 그 사이 국가를 움직이는 엔진도 업그레이드되지 못했다.

이 낡은 운영체제가 남긴 문제는 예산 낭비만이 아니다. 기업은 시장보다 권력을 읽는 법을 배웠고, 전문가는 침묵이 생존임을 배웠으며, 국민은 국가보다 정권을 먼저 보게 됐다. 회계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이 기회의 상실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치른 가장 비싼 대가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했다. AI는 산업화 시대에 설계된 국가 운영의 전제 자체를 흔들고 있다. 초거대 AI 기술은 국가의 입법과 행정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진화하며, 관료 조직이 독점하던 분석과 정책 설계의 영역까지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국가 거버넌스의 진화 속도를 앞지르는 시대다. 산업화 시대의 운영체제로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제는 어렵다.

그 징후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우수한 인재가 모인 정부를 향한 국민의 신뢰는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문제는 공무원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일하는 방식, 즉 국정운영의 엔진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AI 시대, 정부의 역할은 달라져야 한다. 산업화 시대에 정부가 자원을 배분하고 방향을 지시하는 지휘자였다면, AI 시대 정부는 가장 좋은 답이 탄생하도록 생태계를 설계하는 조직이어야 한다. 권한을 쥐는 정부에서 역량을 연결하는 정부로 바뀌어야 한다.

국정 운영의 엔진을 다시 설계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작점은 멀리 있지 않다. 전문성이 국가의 척추가 되고, 공론이 정책 결정의 관문이 되며,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 프로젝트가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에 국가의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정치가 먼저 선언하고 기업이 뒤따르는 구시대적 방식부터 단절해야 한다. 시장의 자율적 판단과 글로벌 스탠더드가 정부의 정치적 타임라인보다 앞서는 시스템의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 주인공만 바뀐 채, 우리는 또 다른 허리 숙인 대통령과 마주 선 기업 총수들을 보게 될지 모른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권교체를 넘어 국가 운영체제까지 업그레이드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정부가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나라. 그것이 넥스트 거버넌스가 지향하는 대한민국이다.

이영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초빙석학교수·前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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