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온 우주가 돕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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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온 우주가 돕는 날

여름은 두 개의 몸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빗소리로 베인 것과 폭염으로 허물어진 것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럴 땐, 슬픔도 쉬이 입고 벗는 옷이라면 좋겠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울분을 받아내는 마음은 또 얼마나 힘겨운 삶을 견뎌왔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각자의 사정으로 꽉 차 있을 텐데도 짬을 내어 남을 돕는 이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불국사 나무 그늘이 푸른 이끼를 키워낸 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작은 참새가 탁구공처럼 가볍게 돌아다닌다. 여름이 움직이는 계절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풍경이다. 저녁에는 동궁과 월지를 걸었다. 연못에 핀 연꽃들을 바라봤다. 연잎이 작으니까, 꽃잎도 작았다. 씨방들이 또 한 번 꽃을 피울 것만 같다.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흙길을 걸으니 생기가 돌았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항동푸른도서관으로 시 읽기 강의를 하러 갈 때도 이런 길을 자주 걸었다. 왕복 4시간 거리에도 지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커다란 햇살이 부서지던 은빛 호수며 나무가 우거진 숲길이 선연하다.

강의 첫 시간에 수강생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모르겠다’와 ‘어렵다’였다. “저는 사실 시에 대해서 잘 몰라서 듣기만 하려고 왔는데요….” 감상을 얘기할 사람을 찾느라 수업 시간이 힘겹게 흘렀다. 내가 느낀 것이 터무니없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만 해도 시 읽기는 반은 성공이다. 상황을 바꾸는 건 기세라고 했던가? 나는 의지를 다졌다.

“이번 주부터 오른쪽 첫 번째 줄부터는 시를 읽고 왼쪽 첫 번째 줄부터는 감상을 이야기할 겁니다. 그럼 한 번 이상은 다 발표하게 되는 거예요.”

강의실 안이 일제히 술렁였다. 앉은 자리를 확인하고는 걱정하는 사람, 안도하는 사람, 나의 기세에 기가 막혀 웃는 사람들. 약간의 강제성은 도움이 됐다. 한 편의 시에 대해 모두가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선물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은 시를 읽은 감상으로 자신이 쓴 시를 낭독한 분도 있었다. 김현 시인의 ‘돌 옮겨 적기’라는 제목을 빌려와 쓴 시였는데, 남편에 대한 사랑을 돌에 옮겨 적은 시였다. 낭독이 끝났을 땐 모두가 손뼉을 쳤다.

강력한 마음의 힘에 대해서라면 지하철에서의 일도 생각난다.

“난 꼭 앉아서 갈 거야.”

친구는 내게 사람이 많아서 앉아 갈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반드시 앉아서 가고 말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희망을 붙드는 순간까지는 살 만하니까. 역시 빈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젊으신데 여기 앉아서 가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내게 자리를 양보한 할머니는 노약자석으로 갔다. 내 얼굴에서 앉고 싶다는 마음을 읽은 것일까? 물론 나는 진짜 앉고 싶었다. 그래도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받을 줄은 몰랐다. 젊으신데 앉아서 가라니…. 참으로 시적이다. 그 말의 힘으로 나는 또 시를 쓴다. 투명하게 나를 비추고, 세상을 비추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연꽃은 더러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할머니는 내 표정에서 흙탕을 읽었을 테다. 흙탕인 젊은이의 마음에서 연꽃 한 송이 피어나라고 조심조심 세상을 내디뎌보라고 그런 말을 했을 테다.

시인 고영민은 철심이란 시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영영 타지 않고 남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나는 ‘말 한마디’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모난 마음을 둥글려주는 말. 오금 저린 내 그림자를 펴주는 말. 온 우주가 돕는 날은 어쩌면,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오기도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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