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칼럼] 韓日관계에 드리운 '2019년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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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 칼럼] 韓日관계에 드리운 '2019년의 그림자'

아베 신조 총리 시절인 2019년 6월 오사카 G20 정상회담은 한·일 관계사에서 영원히 회자할 일이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배상 판결(2018년 10월)을 계기로 ‘복합골절’ 수준으로 패인 양국 관계의 흉터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아베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의 만남은 8초간 악수가 전부였다. 아베는 한국을 뺀 18개국 정상들과만 회담했다.

문 전 대통령은 지난해 나온 회고록에서 그때 ‘까이고 물먹은’ 심정을 원색적으로 표현했다. “정말로 속 좁은 모습”에 섭섭하고 불쾌했다며, 일본은 “도량이 없는 나라” “추락하는 나라”라고 맹비난했다. 전 세계에서 딱 20개의 주요국 수반만 모인 자리에서 그 홀대를 받았으니 분해서 잠도 오지 않을 일이다. 아무리 미워도 자기 나라로 찾아온 외빈을 그렇게 대접하는 것은 경우가 아니다. 아베는 옹졸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부분을 읽다 보면 이번엔 문 전 대통령의 처사에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오사카 회담 직후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발표했다. 그러자 한국 측이 꺼낸 보복 카드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다. 지소미아 연장과 종료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자 여론조사를 해 보기로 했는데, 문 전 대통령이 지침을 줬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장’ ‘종료’ ‘유지는 하되 공유는 중단’ 이렇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문 전 대통령이 세 번째를 빼고 ‘연장 vs 종료’만 놓고 조사를 지시했다. 당시 반일 감정에 설문 문항의 편향성까지 더해져 당연히 종료 쪽이 압도적으로 나왔다. 문 전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보고 판단한 것은 아니라면서도, 판단의 확신을 갖는 데 큰 뒷받침이 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지소미아로 우리가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고 한다. 대표적인 게 일본이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 자산으로 수집한 북한 잠수함 동향과 무기 개발 관련 정보다. 그런 소중한 안보 자산을 홧김에 차버리려 한 것이다. 여기에 군사협정 폐기라는 중차대한 안보 결정을 궁극적으로 대중 여론에 맡기려 했다는 데선 할 말을 잃게 된다. 아베는 졸렬했지만, 문재인은 무책임했다.

일본 자민당의 선거 참패로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거취가 불투명하다. 자민당이 참의원과 중의원 모두 과반 유지에 실패한 것은 1955년 창당 후 7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어제 발표한 미·일 관세 협상 타결안을 보면 선거 전에 미국과 관세 협상을 사실상 매듭지었으나, 선거 영향을 감안해 미뤄 놓은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미·일 관세 타결이 이시바 정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셈법도 복잡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 정계의 대표적 지한파인 그의 입지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민 주권이 아니라 ‘천황 주권’을 내세운 참정당의 돌풍은 일본의 보수화를 상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1기 때 한·미·일 균열 구도의 재현이 우려된다. 트럼프는 더 강력한 ‘스트롱맨’으로 돌아왔고, 한국에서는 진보 정권이 다시 들어섰다. 일본에서는 ‘여자 아베’로 불리는 다카이치 사나에 의원의 집권도 거론되고 있다. 재일 한국인 최초의 도쿄대 정교수를 지낸 강상중 교수의 조언을 되짚어볼 만하다. 한국의 민주당 지지층에서 팬이 많은 그는 <한반도와 일본의 미래>에서 문 전 대통령의 ‘지일(知日)’ 수준이 백지상태였음을 꼬집는다. 강 교수는 완벽하지 않더라도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견지할 것을 강력히 주문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법인 대 법인으로 계약이 맺어졌는데, 전문경영인이 바뀔 때마다 딴소리한다고 느낄 수 있다. ‘간코쿠 쓰카레’(한국 피로증)도 그래서 나올 말일 게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일 관계에 대해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식 징용 피해 배상안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합리적 접근이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대북 유화책에선 불안한 조짐이 보인다. 한국 정부가 북한에 과도하게 경도될 때 한·미·일 협력이 틀어졌고, 결국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문 정부가 지소미아를 파기하지 못한 이유도 주한미군 감축으로 조여온 압박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문재인과 김대중의 대북 정책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에 대한 협력 리더십의 유무라는 강 교수의 분석을 새겨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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