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악연'이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 17일 넷플릭스가 발표한 4월 둘째 주 드라마 시리즈 시청 순위에서 '악연'은 비영어권 시리즈 부문 차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사채를 갚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려는 백수, 시체를 묻어 음주 뺑소니 사고를 숨기는 한의사, 학창 시절 성폭행범들에게 복수하기로 다짐하는 간호사까지 3명의 등장인물이 지독한 인연으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그린다. 원작은 최희선 작가가 2019년 4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카카오웹툰에 연재한 웹툰이다.
원작 웹툰 <악연>을 쓴 최 작가를 18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지금은 전 세계 시청자가 보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원작 작가지만, 그 역시 여느 청년과 똑같은 고민에 빠져있던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악연>은 '지금 걷는 이 길이 맞을까', '내가 해낼 수 있을까'는 망설임을 이겨내고 무턱대고 도전한 결과였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를 꿈꾸셨나요?
저는 만화책을 좋아하고 낙서를 끄적이는 학생이었습니다. 독자분들도 학창 시절에 반에 이런 친구 한 명씩은 있었을 거예요. 당시는 종이책으로 만화를 읽던 시절이라 스크린톤(흑백 만화에 그림자와 질감을 더하는 필름)이나 펜도 사보면서 만화가라는 꿈을 잠깐 꿨습니다.
하지만 만화책을 따라 그리거나 얼굴만 그리는 낙서 수준이었습니다. 출판 만화 시장에 뛰어들 엄두도 나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노력을 하거나 만화가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지는 않았습니다.
만화 관련 전공을 공부하셨나요?
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 학과 진학도 고려했어요. 문턱이 높아 포기했지만요. 그래도 그림 그리는 일은 좋아해서 회화과에서 한국화를 전공했습니다.
대학교에서 친한 동기를 사귀었는데 저와 비슷한 케이스였어요. 만화를 좋아하면서 회화과에 진학한 친구였죠. 같이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하지만 전공 수업을 따라가기도 바빠 자연스럽게 만화가란 꿈은 잊고 살았습니다.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한 4학년 때 고민을 시작했어요. 전공인 미술은 제 길이 아닌 것 같고, 어떤 일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더라고요.
마침 웹툰 시장이 한창 커지는 시기였어요. 그때 그 친구가 웹툰을 그려 '도전 만화'(아마추어 만화 게시판)에 올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한 번 시도나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도전했습니다.
무턱대고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만화를 제대로 그리는 방법도 몰랐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입문용 태블릿을 구매하고 포토샵 학원에 다녔습니다. '일단 짧은 단편 하나라도 완성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 첫 작품 <조우>를 연재하기까지 과정이 궁금합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는 시간에 계속 만화를 그렸어요. 이야기를 구상하고 콘티(만화의 설계도)까지는 어찌어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컬러가 들어가는 만화를 그리는 건 차원이 다른 어려운 작업이더라고요. 채색작업부터 헤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기왕이면 아르바이트도 웹툰과 관련된 일을 해보는 게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인 글을 찾아 여기저기 지원했죠. 하지만 실력이 부족해 아무 데서도 답이 오지 않았죠. 그 와중에 딱 한 분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규삼 작가였습니다.
처음에는 선을 따는 보조 작업으로 지원했어요. 그런데 작가님이 저에게 채색작업을 맡기더라고요. 제가 채색은 해본 적이 없어 자신이 없다고 말했죠. 그런 저에게 김규삼 작가가 성실하게만 하면 된다, 모르는 부분은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김규삼 작가 밑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많이 성장했습니다. 작가님이 저에게 항상 친절하게 설명해줬고, 대우도 좋았습니다. 덕분에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려움 없이 제 개인 작업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단편작을 하나씩 완성해서 도전 만화에 올렸어요. 그 작품을 본 다음웹툰(현 카카오웹툰)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조우>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특유의 ‘뒤통수치는’ 전개 방식은 어떻게 발전했나요?
학창 시절에 '반전 드라마'라는 예능이 나올 정도로 '반전'이란 키워드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장르를 좋아해서 가리지 않고 많이 봤어요.
영화 <혹성탈출>이 기억에 남아요. 도대체 어디서 뒤통수를 칠까 생각하며 봤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메멘토>,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펄프픽션> 같은 영화도 인상적이었어요. 전형적인 서술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저런 독창적인 방법으로도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구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작품의 영감은 어디서 얻는지 궁금합니다.
실제 뉴스를 보고 가장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뉴스를 보면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소설 같은 사건도 많잖아요. 가끔 작품 구상을 하며 '이런 일이 실제로 있을까?'는 생각에 찾아보면 실제로 이미 벌어진 사건이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아이디어가 작품으로 발전할 때가 많아요.
’악연’의 구상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단편으로 만화를 시작한 후, 다음에는 중장편 만화를 그려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긴 이야기를 짜는데 미숙했어요. 그래서 서로 다른 단편들로 구성된 긴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으로 <악연>의 구상을 시작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 인물이 나와 하나의 큰 줄기로 연결되는 소동극 같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다른 매체에는 이런 작품이 많은데, '웹툰에도 이런 이야기 구조가 있었나?'하는 생각도 <악연>에 도전하게 된 이유입니다.
처음으로 장편작을 쓰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악연>은 3개의 단편 이야기 <사채 빚의 남자>, <시체를 유기한 남자>, <상처받은 여자>가 하나로 이어져 장편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아무래도 서술 방식에 대한 우려가 컸습니다. 이런 구조는 영화나 책에는 어울려요. 반면 매주 한 회씩 공개되는 웹툰에서는 독자의 흥미를 끌기 어렵죠. 3개의 이야기가 엮이기 전까지도 각자 다른 재미도 있어야하고요. 그래서 세 명의 이야기를 어떻게 배치할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악연>을 쓰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가 무엇이었나요?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는 <상처받은 여자> 속 '주연'의 이야기였습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범죄란 없죠. 그렇지만 주연은 <악연>의 세 주인공 중 유일한 피해자이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질이 나쁜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죠. 주연의 이야기는 앞선 두 명의 이야기에 비해 덜 자극적이더라도 피해자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줬습니다. 대사를 쓸 때 매우 많은 시간을 들였고요.
처음 드라마 제작 제의를 받았을 당시 심정이 궁금합니다.
사실 <악연>이 연재 당시에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은 아니었어요. 완결 후 시간이 꽤 지난 후에 판권 제의가 와서 신기했습니다. 당연히 너무 기뻤죠. 좋은 감독, 제작진과 배우가 참여하고, 다른 데도 아닌 넷플릭스에서 만든다고 하니 더욱 신기했습니다.
걱정보단 궁금한 점이 많았어요. <악연>에 나오는 트릭이 보통 만화나 소설에서 쓰이는 장치들이거든요. 이 요소를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각색할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시나리오를 받아 읽으면서 '아 이런 방법으로 각색했구나'는 생각이 들어 흥미로웠습니다.
앞으로 작품 계획이 궁금합니다.
현재는 신작을 위한 글과 콘티 작업까지 마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대 다니면서 경험한 에피소드를 담은 작품이 될 겁니다. 지금까지 했던 만화와는 결이 다른 장르죠. 전작들보다는 대중적인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전부터 독자들이 많이 보는 장르에 도전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고민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과 잘 할 수 있는 일은 다르잖아요. 그림도 다양한 장르를 해볼 만한 자신감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다른 장르에 쉽게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이야기가 생각나고, 그림 실력도 늘면 어떤 장르든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루드비코 작가의 웹툰 <인터뷰>, 영화 <스내치>, 제프리 디버 작가의 소설 <옥토버리스트>, 한국 드라마 <괴물>을 추천합니다.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