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통의 낭비자. 우리는 얼마나 고통을 미리 내다보는가,/고통의 슬픈 지속을, 혹시 끝나지 않을까 하면서. 그러나/고통은 우리의 겨울 나뭇잎, 우리의 짙푸른 상록수,/우리의 은밀한 한 해의 계절 중의 한 계절 ―, 그런 시간일 뿐/아니라 ―, 고통은 장소요 주거지요 잠자리요 땅이요 집이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중
김재혁 시인·고려대 명예교수
릴케는 고통에 대해 색다른 견해를 펼친다. 우리는 이미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피하려 하며 고통을 헛되이 쓰고 있다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의 고유한 삶을 건설하는 데 창조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 고통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한다. 차라리 고통을 초집중의 순간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낫다. 고통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성숙의 계기를 마련하고 인생을 더욱 값지게 만들자는 것이 릴케의 생각이다. 릴케가 초기의 대작 ‘기도시집’에서 모토로 내세운 것은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 앞에 경건해지고자 했다. 그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삶이었고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보았다. 평생 유럽 각지, 북아프리카까지 12개국 100군데로 떠돌면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성장하는 한 그루 나무로 생각했다.
그는 ‘기도시집’에서 “오 주여, 저마다 고유한 죽음을 주소서./사랑과 의미, 고난이 함께한/삶에서 우러나오는 죽음을 주소서”라고 기원한다. 죽음을 자신이 가꾼 나무의 열매로 보고 인생을 마무리하는 계절에 이르러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현세에 충실한 삶을 살자는 다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오직 “한 번뿐, 단 한 번뿐”(‘9비가’)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삶, 죽음에 대한 릴케의 이처럼 열린 관점은 우리에게 ‘지금, 이곳’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