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비슷한 논리를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이 탄핵 심판 때 들고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나 탄핵 남발을 경고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평화적인 대국민 경고성 호소형 계엄이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계엄 선포 즉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어 경고성 호소형 계엄은 존재할 수 없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 행사를 방해해 포고령의 효력을 상당 기간 지속시키고자 했다”라며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전부 탄핵했다.
형사 법정은 尹 주장의 팩트를 검증하는 자리
헌재에서 완패한 주장을 형사 재판에서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최소한 변호사를 바꾸거나 기존 논리를 일부라도 개보수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14일 내란 혐의 첫 공판에서 “군정 실시를 위한 계엄이 아니다”라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공소 사실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열거하면서 “난센스” “코미디”라며 93분간 후배 검사를 힐난했다. 윤 전 대통령 스스로 전두환 내란 사건 판결을 분석했다고 했는데, 과연 거기에 적힌 대통령의 권한, 계엄 요건이나 절차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의 법정 진술을 자세히 보면 더 심각하다. “감사원장 탄핵 등은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해 대통령이 가진 비상조치권을 통해 국민이 나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계엄을 선포했고, 병력은 질서 유지 목적으로 투입했으며, 계엄 선포 전 어느 때보다 활발한 국무회의가 있었다.” 헌재에서의 주장 판박이다. 윤 전 대통령이 첫 재판서 이렇게 못 박으면 변호사가 방향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대선 원인 제공자의 말, 다른 이슈 흡수할 것
이쯤 되면 피고인의 방어 논리 대신 법정을 정치적 목적 달성 등 다른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떤 정치인이 패소한 논리를 법정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지지자를 잃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지지자 없는 정치인은 존재할 수 없지만 법정에서 지지자를 앞세우는 건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윤 전 대통령은 수사기관에서 왜 계엄을 선포했는지 등을 제대로 조사받은 적이 없다. 공수처 조서엔 날인을 거부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지도 않았고, 검찰은 ‘명태균 게이트’ 특검 등을 계엄 이유로 추정할 뿐이다. 이번 형사 재판이 제대로 된 계엄 진상 규명의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형사 법정은 피고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법관의 지휘 아래 윤 전 대통령의 발언 중 어떤 부분이 팩트인지, 허위인지 검증될 것이고, 모든 말이 중계된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 투표일 전까지 총 5차례의 공판에 출석한다. 조기 대선의 원인 제공자인 그가 매회 쏟아낸 ‘불신의 말’은, 그를 대선 한복판에 두면서, 동시에 다른 대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다.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 좋아요 0개
- 슬퍼요 0개
- 화나요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