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尹 내란 혐의 재판, ‘대선 블랙홀’ 되나

3 weeks ago 8

정원수 부국장

정원수 부국장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12·3 비상계엄 관련자 중 내란 혐의로 처음 기소될 때쯤 형법상 ‘불능(不能) 미수’를 주장하려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불능 미수는 백색 가루를 독약으로 알고 먹였는데, 사실은 설탕이라 사망하지 않는 것처럼 실행의 수단이나 대상의 착오로 결과 발생이 불가능한 경우를 말한다. 계엄은 선포됐지만 기본권을 침해할 의도가 없었다거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위험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군경 투입 상황까지 공개된 마당에 이런 사후적 방어는 통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없던 일이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비슷한 논리를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이 탄핵 심판 때 들고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나 탄핵 남발을 경고하기 위한 일시적이고 평화적인 대국민 경고성 호소형 계엄이라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에서 “계엄 선포 즉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어 경고성 호소형 계엄은 존재할 수 없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권 행사를 방해해 포고령의 효력을 상당 기간 지속시키고자 했다”라며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을 전부 탄핵했다.

형사 법정은 尹 주장의 팩트를 검증하는 자리

헌재에서 완패한 주장을 형사 재판에서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최소한 변호사를 바꾸거나 기존 논리를 일부라도 개보수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14일 내란 혐의 첫 공판에서 “군정 실시를 위한 계엄이 아니다”라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공소 사실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열거하면서 “난센스” “코미디”라며 93분간 후배 검사를 힐난했다. 윤 전 대통령 스스로 전두환 내란 사건 판결을 분석했다고 했는데, 과연 거기에 적힌 대통령의 권한, 계엄 요건이나 절차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의 법정 진술을 자세히 보면 더 심각하다. “감사원장 탄핵 등은 넘어갈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해 대통령이 가진 비상조치권을 통해 국민이 나서길 바라는 마음에서 계엄을 선포했고, 병력은 질서 유지 목적으로 투입했으며, 계엄 선포 전 어느 때보다 활발한 국무회의가 있었다.” 헌재에서의 주장 판박이다. 윤 전 대통령이 첫 재판서 이렇게 못 박으면 변호사가 방향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대선 원인 제공자의 말, 다른 이슈 흡수할 것

이쯤 되면 피고인의 방어 논리 대신 법정을 정치적 목적 달성 등 다른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예전에 어떤 정치인이 패소한 논리를 법정에서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지지자를 잃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지지자 없는 정치인은 존재할 수 없지만 법정에서 지지자를 앞세우는 건 몰락을 재촉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실 윤 전 대통령은 수사기관에서 왜 계엄을 선포했는지 등을 제대로 조사받은 적이 없다. 공수처 조서엔 날인을 거부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지도 않았고, 검찰은 ‘명태균 게이트’ 특검 등을 계엄 이유로 추정할 뿐이다. 이번 형사 재판이 제대로 된 계엄 진상 규명의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형사 법정은 피고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판사와 검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법관의 지휘 아래 윤 전 대통령의 발언 중 어떤 부분이 팩트인지, 허위인지 검증될 것이고, 모든 말이 중계된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 투표일 전까지 총 5차례의 공판에 출석한다. 조기 대선의 원인 제공자인 그가 매회 쏟아낸 ‘불신의 말’은, 그를 대선 한복판에 두면서, 동시에 다른 대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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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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