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유재동]‘제조업 주권론’의 시대

1 day ago 1

유재동 산업1부장

유재동 산업1부장
‘철의 도시’가 요즘 차갑게 식었다. 경북 포항의 ‘포스코 1선재공장’에선 반년이 넘도록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45년간 철강 제품을 생산하던 이 공장은 작년 11월 깊은 불황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 공장 폐쇄를 아쉬워하며 직원들이 찍은 단체사진엔 그 표정에 착잡함이 짙게 묻어났다. 회사는 해체된 설비들이 널브러져 있는 이곳을 앞으로 어떻게 정리 또는 활용할지 못 정한 상태다. 그만큼 업(業)의 미래가 캄캄하다는 얘기다. 한때 ‘민족의 불꽃’, ‘산업의 쌀’이라는 대접을 받아 온 철강산업이 호된 된서리를 맞고 있다.

中에 휘청이는 한국의 뿌리 산업

철강은 경기침체와 중국의 무차별 저가 공세로 시장이 잠식당한 대표적 업종이다. 석유화학, 배터리 등 다른 뿌리산업들도 비슷한 처지다. 그뿐이 아니다. 전기차, 가전, 반도체 등 중국과 경쟁 관계에 있는 모든 산업이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했다. 얼마 전 만난 대기업 CEO는 “우린 벌써 주4.5일제 얘기가 나오는데 중국은 일머리 있고 주72시간씩 일할 각오가 돼 있는 대졸자가 한 해 1200만 명이나 쏟아진다”, “중국 연간 연구개발(R&D) 투자액(800조 원)이 우리 정부 전체 예산보다도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공장 시찰에서 “우린 과거에 성냥, 비누, 양철을 수입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세계 제조업 1위 대국이 됐다”고 뻐기듯이 말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폭탄에 맞서 글로벌 ‘제조업 전쟁’의 포문을 연 것이다.

요즘 국내 산업계에는 “중국이 손대는 산업은 그냥 접어야 한다”는 자조가 팽배하다. 비용이나 물량으로는 상대가 안 되고, 기술력도 별 차이가 없으니 겨뤄봐야 승산이 없다는 것이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합리적인 경영 판단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공급망이 안정되고 국가 간 분업이 원활하던 20, 30년 전과 상황이 다르다. 뭐든 손 놓고 멍하게 있다가는 순식간에 자기 안방을 내주고 글로벌 무대에서 무참히 짓밟히기 십상이다. 공장 문을 닫는 것은 단지 제품 생산을 중단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간 어렵게 이뤄온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의 맥이 끊기고, 전후방 산업 생태계도 연쇄 타격을 입는다는 뜻이다.

제조업을 포기한 대가가 얼마나 쓰라린지는 미국이 보여주고 있다. 근현대 글로벌 산업의 헤게모니는 영국에서 미국을 거쳐 1980년대 일본, 2000년대 중국으로 이동했다. 40년 전에 제조업 주권을 넘겨준 미국은 이제야 뒤늦게 조선, 섬유, 철강 등 전통산업 재건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생산 인프라가 사라진 지 오래고, 수십 년 전 공장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일터를 떠났다. 특히 지나치게 올라버린 인건비가 발목을 단단히 잡는다. 미국 본토에서 아이폰을 생산하겠다는 트럼프의 야심 찬 구상을 월가는 “허구적인 얘기”라고 일축한다. 한 대에 500만 원이 넘는 스마트폰을 누가 사겠냐는 것이다.

AI 시대일수록 제조업 기반 지켜내야

많은 국가가 제조업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것은 반드시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동안 쌓아올린 제조업 기반이 더 발전된 산업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어서다. 한국이 1960년대 가발, 섬유로 시작해 중공업, 자동차, 반도체 등 고부가 첨단 업종으로 주력 산업을 계속 진화시킬 수 있었던 것도 기존 분야에서 신산업의 싹을 지속 발굴한 덕분이다. 요즘 테크업계에선 소버린 인공지능(AI)이 화두다. AI 기술이 우리 산업에 만개하기 위해서는 그 토대가 되는 뿌리산업부터가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줘야 한다. 새 정부도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각오로 선대가 피땀 흘려 이룬 산업 포트폴리오를 지켜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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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산업1부장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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