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시장 활성화, 해외선 ‘기업자살’
특히 이 후보는 이날 페이스북에 “주가지수 5,000 시대를 열겠다”며 “상장회사의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소각해 주주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도록 제도화하겠다”고 했다. 자사주 소각은 펀드 매니저 등 투자자가 주축인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 내놓은 차기 정부 7대 과제에 포함된 내용이다. 이 후보가 이를 언급하면서 특정 집단의 주장에 한쪽 귀를 내어준 모양새가 됐다.
기업들은 주가 부양, 경영권 방어, M&A 등을 위해 자사주를 사들인다. 기업이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가 유지될 때 주식을 팔고 빠져나가는 출구 전략을 구사하는 헤지펀드들은 당연히 자사주 매입과 소각을 요구한다. 배당에는 배당소득세가 붙지만, 자사주 매입이나 소각으로 주가가 올라 얻는 금융투자소득엔 세금이 없다. 금투세 도입은 이 후보가 지난해 폐지에 찬성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기업이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 주식이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오르고 주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 수치만 변할 뿐 기업가치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투자나 경영권 방어 수단,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은 사라진다. 논쟁적 사안을 코스피 5,000 시대를 위한 모범답안처럼 제시하며 희망 고문할 일이 아니다.미국에서 자사주 매입은 원래 불법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때인 1982년 허용했다. 이후 미 주식시장은 기업의 돈을 빼가는 현금인출기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대기업은 2015년 이익의 110%를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썼다. 대출까지 받아 주주 환원에 쓴 것이다. 투자에 진심인 한국 중국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미 제조업이 무너지고 중산층 일자리는 사라졌다. 로버트 에이어스 프랑스 인시아드(INSEAD) 경영대학원 교수는 “자사주 매입은 기업 자살(corporate suicide)”이라고 비판했다.
경고산업 밸류업 위한 대타협 나서야
한국 기업의 PBR이 낮은 건 낮은 주주환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업의 수익성과 성장성이 떨어져도 주식이 저평가된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 19.5%는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게 현실이다. 실적과 미래 가치의 결과인 주가 자체를 정책 목표로 두면 문재인 정부에서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처럼 마차가 말을 끄는 식의 ‘주가주도성장론’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국가 경제를 책임지겠다는 대선 후보라면 한쪽 귀는 주주가치에 기울이더라도, 다른 쪽은 기업가치에 열어둬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는 1400만 주식투자자의 표심을 핑계로 기업과 소액주주의 갈등을 부추기는 자해성 공약은 내놓지 말아야 한다. 기업이 자사주 매입에 회삿돈을 쓰지 않고 생존과 성장, 일자리를 위해 적극 투자하게 만든다면 독일처럼 가업 승계를 위한 상속세 감면이나 미국처럼 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장치 등을 두는 방안을 함께 논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제는 기업 지배구조와 주주환원 논란을 넘어 기업 영속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산업 밸류업’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으로 한국 기업의 몸값을 올려야 한다. 그것이 코스피 5,000으로 가는 순방향의 길이다.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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