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문병기]‘을의 정치’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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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기 정치부장

문병기 정치부장
26일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은 이재명 대통령은 국민의힘 김용태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해 “제가 이제 ‘을(乙)’이니 잘 부탁드린다”고 몸을 낮췄다. 나흘 전인 22일에는 여야 지도부를 관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취임 18일 만에 이뤄진 회동으로, 문재인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빠른 속도다.

좋은 출발이다. 하지만 협치의 온기는 퍼지기도 전에 식어가는 모양새다. 국민의힘은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 상임위원장 선출 강행에 이 대통령을 향해 “공허한 말잔치”, “양두구육의 전형” 등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본격화되고 있는 특검 정국은 더 큰 뇌관이 될 수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에 대한 수사를 넘어 정당해산심판 청구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여야 대치는 언제든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다.

대부분 실패로 끝난 여야 협치

이 대통령은 “경제와 민생을 살리는 데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며 국민의힘 의원들을 향해 언제든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또 “외교에는 색깔이 없다.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국익이냐, 아니냐가 유일한 선택 기준”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실은 여야정 협의체 추진의 뜻을 내비쳤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내각이 완성된 이후 현안별 협의체를 꾸릴 것인지, 여야 지도부 간 협의체로 할 것인지 등 추후 논의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여야정 협의체는 과거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김대중 정부는 취임 후 8차례에 걸친 여야 영수회담을 통해 여야 정책협의회 등을 출범시켰다. 정국에 따라 등락이 있었지만 이 협의체는 외환위기 속에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고강도 구조조정 관련 법안들을 처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재인 정부도 2018년 11월, 5당 대표와 함께 여야정 국정 상설협의체 출범에 합의했다. 하지만 회의는 한 차례 열리는 데 그쳤다. 조국 사태와 공수처법 처리 등 검찰 개혁을 둘러싼 극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협의체는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협치의 성패를 가른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차이는 절박함이다. IMF 위기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선 여야 모두 위기 극복이 우선이라는 공감대가 여야정 국정 협의체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됐다. ‘DJP연합’으로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 정부에는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 운영이 불가능했다. 국정 협의체가 들러리가 아닌 실질적으로 권력을 나누는 기구가 된 셈이다. 반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와 보수 야당 사이에는 시작부터 불신이 깊었다. 적폐 청산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면서 야당을 협치의 대상이 아닌 청산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다. 2020년 총선에서 여당이 압도적인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도 협치의 독이 됐다. 야당의 협조에 대한 절박함 대신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더 귀를 기울이는 선명성 경쟁이 우선시됐다.

시험대 오른 ‘을의 정치’

이재명 정부에선 현 경제 상황을 ‘제2의 IMF’로 규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대중 정부 시절 겪은 ‘IMF 위기’ 경기침체의 골은 얕을지 몰라도 장기 저성장 기조와 관세 전쟁, 긴장감을 더해가는 한반도 안보 지형 등 복합 위기의 해법을 마련하기는 더 어렵다.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릴 첨단 기술 육성 전략과 이를 뒷받침할 예산, 강대국 패권 경쟁 속 국익을 지켜낼 외교는 야당과 함께해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

관건은 진정성이다. ‘을의 정치’가 성공하려면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고 때로 정치적 셈법을 제쳐 둘 수 있어야 한다. ‘을’을 자처하며 대통령이 내민 손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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