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기업인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를 방문했다. 쿠데타와 정치 불안이 반복되고 있는 이 국가의 한 유력 정치인은 이 기업인에게 비상계엄 이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묻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기업인은 “농담이었겠지만 비상계엄이 한국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꿨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라고 했다.
극단화된 정치 보여주는 쿠데타 낙인찍기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발동한 지 165일이 지났다.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판결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계엄 사태의 파장은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의 불씨가 되고 있다.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비상계엄이 촉발한 극단의 정치가 고착화됐다. 거대 양당은 헌법과 법률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법적 조치들을 쏟아내면서 매일 서로를 향해 ‘쿠데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15일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가 5·18민주화운동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을 상임고문으로 위촉했다가 취소한 것을 두고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또 쿠데타를 벌일 작정인가”라고 비판했다. 하루 전 국민의힘은 조희대 대법원장을 겨냥한 민주당의 사법부 대선 개입 의혹 진상규명 청문회에 대해 “법을 허물고 권력만 세우겠다는 의회 쿠데타”라고 했다. 같은 날 민주당은 “조 대법원장은 정치적 중립을 훼손한 사법 쿠데타의 전모를 고백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쿠데타 세력’이란 손가락질은 상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민의힘의 강제 후보 교체 과정엔 국민의힘 내에서도 ‘친위 쿠데타’ ‘야밤의 정치 쿠데타’ ‘쿠데타 잔당의 쿠데타’라는 표현이 줄줄이 등장했다. 과장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쳐도, 오늘 ‘쿠데타 세력’이라고 낙인찍은 상대와 내일 선뜻 대화와 타협에 나서긴 어렵다. 하루에도 수차례 상대편을 향해, 때론 뜻이 다른 같은 편까지 ‘쿠데타 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정치는 정상이라 보기 어렵다.쿠데타가 정치권의 일상 언어가 된 만큼 극단적인 정치 행태도 확산되고 있다. 이번 달만 해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사퇴하고 대선에 출마하면서 전례 없는 ‘대대대행’ 체제가 출범했고 민주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의 탄핵 추진에 나섰으며 국민의힘은 초유의 대선 후보 강제 교체를 시도했다 실패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7일 앞둔 대선, 국민통합 약속 내놔야
미국 의회에선 거대 양당이 관행적으로 지켜온 암묵적인 선을 넘는 극단적 조치를 ‘뉴클리어 옵션’(핵 공격 수단)이라고 부른다. 소수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의결 정족수를 과반으로 낮추는 조치 등이 포함되는데 공멸을 감수하지 않고는 함부로 취할 수 없는 조치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으로 열리는 조기 대선을 거쳐 출범하는 차기 정부에 민주주의 회복은 피해갈 수 없는 책무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15일 유세에서 “이제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자. 앞으로의 정치는 그렇게 만들자”고 말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12일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과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고,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권력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회복하러 나왔다”고 했다. 대선까지는 앞으로 17일 남았다. 이제 쿠데타 대신 통합과 회복에 대한 진지한 약속을 더 많이 듣게 되길 기대해 본다.
문병기 정치부장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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