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접수하는 연간 사건 수는 해마다 다르지만 최소 4만 건이다. 대법관 1인당 사건 처리 건수도 2023년 기준 3300건을 넘었으며, 하루 평균 9건 이상의 판결을 선고해야 할 정도로 업무 부담이 크다고 한다. 국회 여당은 대법원과 대법관의 이 같은 어려운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신속하게 대대적인 지원을 결정했다. 대법관을 현재 14명에서 30명 또는 100명으로 늘리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발의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시켰다.
하지만 매년 대법원이 접수하는 사건 중 상당수는 한국 법원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 많다. 상고할 수 있는 경우, 즉 상고 사유는 민사소송법과 형사소송법에 한정적으로 열거돼 있다. 예컨대 소송가액이 3000만원 이하인 소액사건은 특별한 사유(법률 위반, 판례와 상반된 판단 등)가 없는 한 상고가 불가능하며, 상고하더라도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이런 사건도 대법원에 신청하는 게 가능하다.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고소·고발인이 불복해 법원에 그 당부를 묻는 연간 수천 건의 재정 신청은 99.9%가 기각된다. 법원 결정이나 명령에 불복해 대법원에 다시 신청하는 절차인 재항고 신청도 연간 수천 건에 이른다.
외국인의 난민 신청은 연간 1만8000여 건에 달하는데, 난민 신청이 불허되면 법무부 장관에게 이의신청을 제기한 뒤 행정소송을 거쳐 패소할 경우 대법원까지 간다. 이 절차는 통상 3~4년이 걸린다. 이 기간에 ‘난민 신청인’은 국내에서 취업할 수 있다. 난민 신청자에게는 이득이고,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고용주에게도 나쁠 게 없다. 대법원도 이를 마냥 제지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항소심에서 1년 이하의 단기 실형이 선고된 형사 사건도 대법원에 상고하면 수도권 구치소에서 지방 교도소로 이감되지 않아 상고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이런 사례를 과감히 줄이는 것이야말로 상고심 개혁의 핵심일 것이다.
대법관 증원의 강력한 근거로 독일에는 대법관이 300명이 넘는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는 독일 사법 체계의 특수성을 무시한 단순 비교에 불과하며, 한국의 현행 법원 시스템과 맞지 않는 주장이다. 독일은 3심제의 최종심으로 여러 개의 전문 최고법원을 두고 있다. 연방일반법원(민·형사), 연방행정법원, 연방재정법원(조세·관세), 연방노동법원, 연방사회법원(연금·사회복지) 등이 그것이다. 이들 최고법원에 재직 중인 판사를 모두 합하면 300명이 넘는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 연방 최고법원 판사의 임명 시스템은 우리와 다르다. 연방 법관선출위원회(Richterwahlausschuss)가 각 최고법원 판사 후보를 선출하고, 연방법무부 장관이 이를 제청하면 연방 내각의 동의를 거쳐 연방대통령이 임명장을 수여한다.
진짜 문제는 하급심에서의 재판 적체다. 2024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3년 한 해 동안 한국 법원에 들어온 사건은 총 666만7442건이다. 민사 본안 사건만 보더라도 미제로 남은 사건이 1심에서만 36만761건으로, 대법원 상고심 1만8281건의 약 19배에 달한다. 2023년 민사 본안 사건 1심 합의부의 평균 처리 기간도 473.4일로, 전년(420.1일)보다 53일 늘어났다.
이 통계만 보더라도 사법부 지원은 하급심부터 우선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초는 방치한 채 정상만 화려하게 꾸민다고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 없다. 대법관 증원이 그들만의 ‘대잔치’가 돼서는 안 된다. 졸속 개혁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