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전유성 씨를 만나러 지리산 둘레길 제3코스(인월∼금계)의 출발점이 있는 인월면을 방문했다. 전 씨의 딸과 사위가 이곳에서 14년째 카페를 운영하고 있기에 그도 몇 년 전부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사실 평생 노마디즘을 실천한 전 씨에게 ‘터전’이란 말은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지리산 둘레길이 있다 보니 이 지역엔 시골답지 않게 다양한 식단을 내놓는 만만찮은 맛집들이 즐비하다. ‘인월쌈밥’은 전 씨의 강력한 추천으로 가본 곳이다. 전 씨와 그의 절친인 MBC 예능의 전설, 이응주 감독도 동행했다. 주인은 40대 중반의 인상이 서글서글한 여자분이었는데, 어쩐지 말투가 호남 억양이 아니다. 그래서 여쭈웠더니 아닌 게 아니라 함양에서 18년 전 밥집을 열었고, 인월로 옮겨 4년째 쌈밥집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소재지는 남원에 속하는 식당인데 손님들 대화에 가만 귀를 기울이니 경상도 사투리가 바투 들린다. 신기한 풍경이고 낯선 풍속이라 할 것이다. 여기 시골의 한적한 식당에서 영호남 사람들이 밥과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한데 먹는 것이다. 서로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 건 이미 촌스럽다.
인월쌈밥은 그때그때 사철 자연이 내놓는 식재료로 밑반찬을 만들어 손님들이 먹고 싶은 만큼 가져갈 수 있게 해놓았는데 그 차림새와 맛이 어마어마하다. 이날은 현지에서 채취한 산나물, 시금치, 갓 담근 겉절이 배추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깍두기, 무생채무침, 참꼬막무침 등이 손님들 상에 놓였다. 주 메뉴는 제육볶음과 갈치조림, 고등어구이.우리는 제육볶음을 시켜 상추에 싸서 먹었다. 큼직하게 썬 돼지고기를 걸쭉하고 되직한 고추장 양념에 재운 제육볶음의 맛은 보름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도 뇌세포에 각인돼 군침이 고이게 할 정도다. 밑반찬들도 하나같이 인상적인 맛을 선사했는데, 그 순간 불현듯 뇌리에 어떤 개념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바로 ‘퓨전’. 시골 쌈밥집에서 웬 퓨전이냐고.
이곳은 함양에서 건너온 분이 차린 식당이고 남원과 함양 사람들이 단골을 이루는 집이다. 자연스레 영호남의 미각이 합쳐질 수밖에 없는 조건인 거다. 실제로 인월쌈밥의 음식은 전라도식의 진한 젓갈맛과 함께 영남풍의 칼칼한 매운맛과 묵직한 단맛을 함께 품고 있었다.
전 씨의 말인즉, 며칠 전에는 전라도 친구가 영산포 홍어를 사들고 찾아와 인월쌈밥 집에서 손님들과 나눠 먹었다고 한다. 영남 출신 사장님이 하는 식당에서 전라도 사람들의 솔푸드 격인 홍어를 너나들이 없이 함께 즐겼다는 것인데, 생각만 해도 정겨운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반목하고 미워하고 적대하는 한국 사회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이 역시 노포여서 가능한 것이고 지리산 자락이어서 가능한 것일 테다. 품고 또 품어서 마침내 사무치게 하는 게 노포고 지리산이다.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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