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요원은 해외에서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정보기관 요원이다. 유학생, 민간기업 지사원 등 다양한 신분으로 위장하고 필요한 경우 식당, 여행사 등 사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한다. 2010년 미국에서 부부 4쌍을 포함한 러시아 해외정보부(SVR) 소속 스파이 10명이 동시에 체포됐다. 이들은 여행사, 회계사무소, 싱크탱크 등에 근무하는 직장인, 미 유명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캐나다와 페루 국적자 등으로 위장한 블랙요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1990년대 중반 뉴저지주에 정착한 위장 부부 공작조도 있었다. 부인은 회계사무소 직원이었고, 간첩단 리더 격인 남편이 집안일을 하며 두 딸을 양육했는데 이웃들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들의 임무는 미국의 각종 사교단체, 정치조직 등에 접근해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친분을 구축하고 고급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안나 채프먼이라는 미인계를 활용한 여성 스파이도 있었다. 그녀는 뉴욕의 부동산회사 대표로 일했는데, 위장 신분을 공고히 하기 위해 영국인과 결혼한 후 남편 성(姓)으로 활동하며 뉴욕 사교계에 침투 중이었다.
이들 간첩단은 2010년 SVR 간부가 미국에 망명해 정보를 제공하면서 노출되고 말았는데, 10년 넘게 미 전역에서 활동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이들은 미―러 간 이뤄진 스파이 교환을 통해 러시아로 돌려보내졌다.2010년대 이후에는 스파이 사건에 중국 블랙요원들이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2018년 중국 국가안전부(MSS) 블랙요원 쉬옌쥔은 위장 업체를 운영하며 미 제너럴일렉트릭(GE)항공 등에 접근해 산업기밀을 빼내다가 체포됐다. 또한 2020년에는 기자 신분으로 위장한 중국 요원이 영국 비밀정보국(MI6) 출신 싱크탱크 대표로부터 유럽연합(EU) 관련 기밀을 입수하다가 벨기에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정보기관이 블랙요원을 파견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 자금이 투입된다. 그뿐만 아니라 노출될 경우 정보망이 붕괴되고 신변이 위험해질 수 있다. 1998년 중국 단둥에서 활동하던 정보사 블랙요원이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이 있었다.
그럼에도 블랙요원을 활용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외교관 신분의 백색요원은 주재국의 견제와 감시로 인해 정보활동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정원 백색요원들이 미 외교협회 수미 테리를 대상으로 정보활동을 하다가 연방수사국(FBI)에 노출된 사건은 이를 잘 보여줬다. 사실 대한민국처럼 학연, 지연을 따지고 교민사회에서 한 사람만 건너도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환경에서는 신분 위장이 생명인 블랙요원의 활동이 쉽지 않다. 그래서 요원 선발 단계에서부터 보안을 비롯한 정보활동 원칙이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블랙요원은 스파이 중의 스파이, 스파이의 꽃으로 불린다. 이 꽃을 잘 키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바로 기본에 충실한 것이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블랙요원에 대해 말과 행동, 의식까지 위장 신분에 맞도록 교육시킨다고 한다. 블랙요원과 관련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 온 우리 정보기관이 깊이 되새겨야 할 부분이다.정일천 가톨릭관동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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