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한 산딸기가 마음을 울릴 때[김민의 영감 한 스푼]

2 days ago 2

샤르댕의 정물화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산딸기 바구니’, 1761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산딸기 바구니’, 1761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소장품.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새빨간 산딸기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제철을 맞아 물이 오른 산딸기가 그득한 바구니 아래 종이처럼 하얀 카네이션 두 송이가 놓여 있네요. 흰 카네이션이 조명처럼 밝혀주는 ‘산딸기 산’은 촉촉한 윤기로 반지르르 빛이 납니다.

하나 꺼내어 입에 넣으면 새콤한 맛이 팡팡 터질 것 같은 광경. 작가는 이 그림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일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유리잔에 물을 담아 그려 놓았습니다. 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 프랑스 화가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1669∼1779)의 ‘산딸기 바구니’입니다.

일상의 감칠맛을 담은 화가

샤르댕은 18세기 프랑스 화가로 동물과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솜씨가 좋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샤르댕은 소박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생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림에 담은 것은 일상에서 누구나 발견하는 과일이나 컵, 물병 같은 물건들 혹은 부르주아나 노동 계층의 삶 속 순간을 담은 풍속화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 정물화는 실력이 낮은 화가들이 그리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살롱전’을 통해 화가들에게 상을 주고 일할 기회를 줬던 권력 기관인 아카데미는,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화가에게 역사화나 초상화를 맡겼습니다. 그 다음이 정물화나 풍경화였죠. 그럼에도 샤르댕은 이례적으로 아카데미 정식 회원으로 인정받고 왕실과 귀족 컬렉터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 산딸기 그림처럼 샤르댕의 정물은 무언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정물화가 인기를 끌었던 네덜란드의 그림 속 화려한 위세를 뽐내는 총천연색 화병이나 테이블 위에 가득한 온갖 음식들의 탐스러운 모습과 비교하면 샤르댕이 그린 물건들은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투명한 유리잔과 마늘 몇 알, 갈색 도자기 물병이 전부인 그림도 있고요. 그림 한가운데 삭힌 홍어가 축 늘어져 있고, 이 흐름이 테이블에 툭 하고 걸친 리넨 천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샤르댕의 정물은 탐스럽고 화려한 무언가를 자랑하기보다는, 그림 속에서 각기 다른 질감을 부딪치게 만들며 리듬을 만들고 한 편의 음악처럼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가벼운 유리잔과 무거운 도자기, 냄새 나는 홍어와 깨끗한 리넨, 그 옆에 꼬리를 바짝 세운 새끼 고양이처럼 말이죠.

이런 샤르댕의 표현 방식을 저는 ‘일상의 감칠맛’이라고 느낍니다. 샤르댕을 좋아하며 자주 언급했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 집의 반쯤 치워진 식탁, 흐트러진 식탁보 한 귀퉁이, 빈 굴 껍데기 옆에 놓인 칼 같은 곳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마음을 뒤흔드는 산딸기

샤르댕의 정물화는 현대로 와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산딸기 그림은 2022년 프랑스 파리의 한 경매에서 예상가를 훌쩍 뛰어넘은 2400만 유로(약 376억 원)에 낙찰됐는데요. 낙찰자가 미국 미술관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정부가 그림 반출을 막아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루브르박물관이 대중 모금을 받아 2년 만에 그림 대금을 마련했고, 지난해 초 산딸기 그림을 매입하면서 이 그림은 프랑스에 남았습니다.

18세기 사람들이 보면 “‘루이 14세 초상’도 아니고, ‘예수의 탄생’도 아닌 고작 산딸기 그림에 376억 원이라니!” 하고 놀랐을까요? 물론 루이 14세 초상이나 유명 화가가 그린 종교화가 지닌 역사적 가치가 훨씬 높지만, 산딸기 정물이 그에 버금가는 대중적 명성을 갖고 대접받게 된 현상은 흥미롭습니다.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의 ‘내용’이 아니라, 그 작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과 ‘연결’돼 있느냐고, 이 ‘연결’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역사화나 왕실 초상화가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여겼던 과거의 사람들은 전쟁이나 영웅 서사 같은 커다란 사건과 인물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살롱전’이 열릴 때 심사해서 좋다고 선정한 작품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받아들였고요. 그런데 사회가 바뀌고 개인마다 각자의 가치관을 지니게 되면서, 그 기준은 달라집니다.

프루스트는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다 어린 시절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는 경험을 중요하게 묘사하죠. 샤르댕과 프루스트 같은 예술가들은 개인의 삶에선 전쟁이나 영웅보다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새콤한 산딸기 하나가 더 크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화가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마음을 흔드는’ 예술가가 수백 년 전부터 성공하고 귀한 대접을 받아왔습니다. 산딸기를 카메라가 기록한 듯 꼼꼼하고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림을 통해 생생한 ‘마음’을 느끼게 만드느냐가 중요하죠.

흰 카네이션과 유리잔이 산딸기의 촉촉한 질감을 극대화하는 샤르댕의 그림을 보는 사람은 “아 저건 산딸기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저 산딸기 정말 먹음직스럽다”고 군침을 흘립니다. 샤르댕의 ‘산딸기 바구니’를 프랑스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만든 건 이렇게 딸기 하나로 뒤흔들린 여러 사람의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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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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