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풍경]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모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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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정선 선임기자 = 조선 22대 정조(1752∼1800)는 부친인 사도세자의 사당을 정비하는가 하면 무덤을 조성할 때 특별히 격이 높아 보이도록 했다. 1795년 을묘년 대규모 원행에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부친의 무덤이 있는 현륭원에 다녀왔다.

이미지 확대 창경궁 월근문 [촬영 김정선]

창경궁 월근문 [촬영 김정선]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을 지나 담장을 끼고 계속 걷다 보면 월근문(月覲門)이 나온다. 문 이름이 특이하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 따르면 월근문은 정조가 1779년 인근에 있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에 가기 위해 지은 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의 신역(新譯) 정조실록을 찾아보면 정조는 당시 전교하면서 "이 문으로 한 달에 한 번 전배(展拜)하거나 혹은 두 달에 한 번 전배하여서 부모를 그리워하는 나의 애통한 마음을 펼 것"이라고 했다.

월근문 안내판에 적혀 있는 대로 경모궁 위치를 찾아가 보면 서울대 의대 건물이 있는 곳에 넓은 터가 나온다. 경모궁 원래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함춘문이 남아있을 뿐이다. 경모궁지는 사적으로 지정됐다.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정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을 경모궁이라 부르고 일대를 정비했다.

이미지 확대 융릉 [촬영 김정선]

융릉 [촬영 김정선]

사도세자는 영조 때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한 후 부친에게 장헌세자라는 칭호를 올렸다. 수은묘(垂恩墓)였던 무덤은 원으로 높여 영우원이라 했다. 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지금의 경기 화성으로 옮기고 이름은 현륭원이라 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왕실 무덤을 나눴다. 후기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을 원(園)이라 했다. 폐위된 왕, 그 외 왕족과 일반인의 무덤을 묘(墓)라고 했다.

현륭원에는 문석인뿐 아니라 무석인(무인 모양의 석물)도 뒀다. 봉분에는 연꽃과 모란 모양을 넣은 병풍석을 둘렀다.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조는 무덤 조성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선 왕권과 정통성 강화의 의지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위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한 바 있다. 혜경궁 홍씨는 세상을 떠난 뒤 현륭원에 합장됐다. 현륭원은 1899년 능으로 높여져 융릉이 됐다.

정조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당시 현륭원 동쪽 언덕에 조성됐다. 이후 풍수상 불길하다고 해 효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할 때 지금의 언덕 자리로 옮겼다. 직접 가 보면 처음 묻힌 곳보다 거리가 좀 더 떨어졌을 뿐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정조와 효의왕후의 무덤인 건릉은 융릉과 같은 경내에 있다.

정조실록 1789년 10월(음력) 기사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것과 관련해 "내가 천원(遷園)하는 일에 대해 오랫동안 계획을 세워 마련한 것은 반드시 비용을 번거롭게 들이지 않고 백성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 해서였다"며 자세하게 그 내용을 언급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정조는 사당을 정비하고 격 있는 무덤을 조성하며 부친을 모셨다. 그가 사도세자 추숭에 몰두한 점은 학계에서 여러 측면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자신이 맞은 부친의 비극을 '오랫동안' 타개해 나가고자 했던 정조는 인재 등용과 규장각 강화, 수원화성 축조 등의 업적을 남기고 1800년 세상을 떠났다.

jsk@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6년02월11일 11시04분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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