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의 교훈…동맹도 자주국방 토대 돼야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을 넘기면서 종전을 향해 치닫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숙원이었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은커녕 국토 면적의 20%를 러시아에 빼앗긴 채 전쟁을 끝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종전협상에서 미국의 '처분'만 기다리는 형편이다. 반면 러시아는 불법 침공을 감행하고도 아무런 처벌없이 전쟁의 목적을 거의 이룬 거나 진배없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낀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미국은 종전협상에서 이권을 챙기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 그동안 군사 지원을 한 대가로 수천억달러 규모의 희토류 광물자원 지분을 요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아예 전쟁에서 손을 떼겠다는 으름장으로 놓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미국과의 광물 협상에서 자국의 안전보장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지만 얼마나 확실한 안전보장을 받을지도 미지수다. 우크라이나는 안전보장 문제와 관련해 역사적으로 뼈아픈 경험이 있다.
옛 소련 붕괴 3년 뒤인 1994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의 핵무기 포기와 안전 보장을 교환하는 정치적 합의가 있었다. 이른바 '부다페스트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우크라이나 등 3국은 소련 시절 보유하던 모든 핵무기를 러시아로 이전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며 그 대가로 미국과 러시아, 영국은 이들 국가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자제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안전을 보장해줄 것으로 믿었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는 말 그대로 각서였을 뿐이었다. 조약이나 협정처럼 법적 구속력이 없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을 때도, 2022년 러시아가 전면 침공했을 때도 각서 서명 당사국 중 아무도 우크라이나 영토보전을 위해 직접 나서지 않았다. 각서는 한낱 '휴지 조각'이었다. 지금 전쟁 3년 만에 희생만 안은 채 종전협상에 내몰린 우크라이나에서는 '핵 포기는 우리의 역사적 실수였다'는 탄식이 또다시 나올 법하다.
이미지 확대
(키이우=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전쟁 발발 만 3년을 나흘 앞둔 20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독립광장에서 스비틀라나 씨(왼쪽)가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펼침막을 들고 있다. 2025.2.21
우크라이나전 종전협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 안보 질서의 서막에 불과하다. 미국이 러시아 편을 들고 나선 종전협상을 계기로 오랜 동맹체제인 나토의 균열도 가시화되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독일 총선 후 유력 차기 총리로 떠오른 프리드리히 메르츠 기독교민주연합(CDU) 대표는 "내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가능한 한 빨리 유럽을 강화해 단계적으로 미국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형태의 나토를 주창하기도 했다. 전후 80년간 미국의 힘에 기댄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안보 질서가 흔들리는 것이다.
특히 독일 총리 후보의 새 '핵우산 방위 공약' 언급이 눈길을 끈다. 메르츠 대표는 총선 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나토 상호 방위 공약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을 거란 사실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일을 비롯한 나토 회원국 5개국은 미국과 '핵 공유협정'을 맺어 미국의 전술핵 배치를 수용하고 있다. 나토식 핵 공유는 핵무기 소유권과 사용 결정권은 미국이 갖되 협정 동맹국은 배치와 운용에 협력하는 구조다. 메르츠 대표는 유럽의 핵무기 보유국인 영국, 프랑스와 핵 공유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유럽의 자체적인 핵우산 강화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의 핵에 유럽의 안전보장을 전적으로 맡길 수 없다는 자각이다.
국제안보 질서의 변화는 한반도 안보 환경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미국의 한반도 안보 정책의 변화 조짐은 아직 감지되지 않지만, 우크라이나나 중동 문제 등에 우선순위가 밀려 있을 뿐 언젠가 닥칠 일이다. 북한 핵 위협에 맞선 미국의 핵 확장억제정책에도 얼마든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전 종전협상에 나타난 '우크라이나 패싱'은 한국이 빠진 한반도 안보 협상도 가능할 수 있다는 우려를 더욱 키웠다. 결국 스스로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굳건한 동맹관계도 가능하다. 더군다나 트럼프 시대의 한미동맹은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는 점이 충분히 증명돼야 한다. 자주국방 없이 강대국에만 기댄 '안전보장'은 안전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bondong@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25년02월25일 09시58분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