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에 그린 고독[이은화의 미술시간]〈360〉

1 week ago 3

도시민의 고독과 외로움을 에드워드 호퍼만큼 잘 표현한 화가가 있을까. 텅 빈 거리, 실내에 고립된 사람, 혼자 영화 보거나 밥 먹는 사람 등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장소나 인물들은 늘 고독하거나 쓸쓸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언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던 걸까?

놀랍게도 어릴 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호퍼가 1891년경 그린 ‘바다를 보는 어린 소년’(사진)이 그 증거다. 작은 흑백 드로잉 속에는 바닷가에 서있는 어린 소년의 뒷모습이 묘사돼 있다. 두 손을 등 뒤로 깍지 낀 소년은 고개를 살짝 떨군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발 앞에서 파도가 치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고 두려움도 없어 보인다. 몸집만 보면 네다섯 살 아이로 보이지만 자세는 진지하고 장난기가 하나도 없다. 마치 호퍼의 후기 작품들에 등장하는 고독한 성인들을 닮았다. 그림의 오른쪽 아래에는 서명도 있다.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그렸다는 건데, 당시 호퍼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게다가 그림이 그려진 종이는 성적표 뒷면이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자신의 성적표 뒷면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인 것이다. 어린 호퍼가 좋지 않은 성적을 받고 낙담한 마음을 담아 그린 건지, 그저 손에 닿는 종이가 성적표였던 건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호퍼는 초등학교 때 공부도 잘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 재능이 더 뛰어나 부모님의 지지와 격려 속에 화가가 되었다. 1882년 미국 뉴욕시 북쪽 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27세 때까지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며 바닷가나 배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어린 시절 이웃에 살던 목사 샌본이 호퍼 사망 후 그의 가족 집 다락방에서 발견한 작품들 중 하나다. “후기 작품의 싹은 항상 초기 작품에서 발견된다.” 생전 호퍼가 말했듯, 초등학교 시절의 이 그림은 훗날 고독을 그리는 화가가 될 그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하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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