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통령 취임 닷새 만에 이뤄진 한일 정상 간 25분 통화에서 껄끄러운 과거사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사실 축하와 감사, 미래 협력에 대한 덕담으로도 시간이 모자랐을 것이다. 다만 이 대통령은 “보다 견고하고 성숙한 한일 관계”를 주문하며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전향적인 자세를 은근히 기대하는 뉘앙스였고, 이시바 총리는 “양국 정부가 지금까지 구축해 온 기반”을 강조하며 윤석열 정부 때의 긴밀한 협력 기조 계승을 바라는 분위기였다.
이 대통령은 전임 윤석열 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해 “굴욕 외교”라며 누구보다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일 관계에서도 실용적 관점이 필요하다”며 ‘협력할 건 협력하고 정리할 건 정리하는 합리적 관계’ 설정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한때 ‘삼전도 굴욕에 버금가는 외교사 최대 치욕’이라고 비판했던 강제동원 피해자 ‘제3자 변제’ 해법에 대해서도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며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물론 새 정부에서 윤석열 정부 때만큼의 강력한 한일 관계 개선 의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와 미래지향 협력을 분리하는 ‘투 트랙’ 접근법을 내세우면서도 “과거사 문제는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하고 있다. 과거사 문제가 늘 잠복해 있는 한일 관계에서 미래 협력 사안과의 분리 접근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그간 한일 관계의 부침은 무엇보다 일본의 무책임이 원인이었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던 우리 정책 기조도 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한일 관계는 한미 동맹의 연장선으로서 한미일 3국 협력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전임 정부의 대일정책은 거센 반발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핵 위협의 고도화와 세계적 진영대결의 격화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새 정부에도 다른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다. 완급은 조절하더라도 그 기조는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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