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정치인이 모르거나 모른 체하는 한국의 재정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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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野 앞다퉈 첨단산업 지원 위한 펀드 공약
재정 여력 없는데 투자금 마련 계획은 빠져
급속한 고령화 고려하면 韓 재정 매우 취약
‘빚앓이’ 이웃 日 보고도 정부돈 쓰려 하는가

3월 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한 대담에서 언급한 ‘K엔비디아’가 큰 화제가 됐다. “(한국에)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하나 생긴다면, (지분의) 70%는 민간이 가지고 30%는 모든 국민이 나누면 굳이 세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오지 않을까”라는 발언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일 논쟁이 이어졌다.

어느 나라나 정부 예산으로 스타트업을 지원한다. 지원받은 기업의 지분 일부를 정부가 가질 수도 있다. 이미 국민연금이 국내외 유망 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이 엔비디아처럼 성장한다면 국민 모두가 그 혜택을 입게 된다. 이 대표의 말을 그 정도로 이해했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에서 “시장 원리를 철저히 무시한 공상적 계획경제”라거나 “엔비디아 국유화로 세금을 없애겠다는 비현실적 정책”이라는 논평이 나왔을 때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지분의 30%를 국민이 갖는다는 말이 계획경제나 국유화를 의미하는 건가.

그러나 며칠 뒤 민주당의 반응에 “어, 이거 뭐지” 싶었다. 첨단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최소 50조 원 규모의 ‘국민참여형 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다. 정부 주도로 펀드를 조성하고 민간과 연기금의 투자를 받는다는 구상이다. 추후 수백조 원 규모로 키우겠다는 말도 나온다. 이러면 그간에 나온 비판에 대해 “그래, 당신들 말이 맞다. 정부 주도로 한번 엔비디아를 만들어 보겠다. 한국판 엔비디아는 국부펀드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는 꼴이 아닌가?

“정부 주도로 혁신기업이 만들어지겠는가, 만일 투자에 실패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런데 아무도 그 투자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묻지 않아 놀랐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술 더 떠 첨단산업 지원을 위해 500조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해야 한다며 맞불을 놨다.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민주당은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노르웨이 등의 국부펀드를 모델로 한다는데, 한국의 정부 재정이 정말 그 나라들만큼 여유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인가?

최근 여야는 국민연금 개혁안에 겨우 합의했다. 연금 고갈 시기를 2055년에서 2064년으로 9년 늦출 수 있는 개혁안이다. 연금 개혁에 진척이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지금 20대 청년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도 아니다. 그들이 60대가 되었을 때 남아 있는 기금이 한 푼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64년에 연금이 고갈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20년 후면 연금 적자가 시작된다. 기금이 바닥나면 연금 재정구조를 현 적립 방식(funding)에서 부과 방식(pay-as-you-go)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하지만, 조만간 연금이 고갈된다는 걸 알면 연금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질 것이다. 결국 정부는 재정으로 연금 적자의 일부를 보전함으로써 고갈 시기를 늦추려 할 것이다. 정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은 뻔한 이치다.

이런 경위로 일본이 국내총생산(GDP)의 200%가 넘는 정부 부채로 고통받고 있다. 지금 한국 정부 부채는 GDP의 50% 수준이니 여유가 있지 않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가계의 순금융자산이 GDP의 300% 수준이다. 가계가 은행에 저축한 돈을 정부가 빌려 쓰고 있다. 반면 한국은 가계의 순금융자산이 GDP의 120% 수준에 불과하다.

급속한 고령화를 고려하면, 지금 한국 정부 재정은 매우 취약한 상태다. 정치인들은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끌어올 자신이 있는 걸까? 일본의 경험을 보면, 기업이 돈을 잘 벌고 그래서 개인 소득도 증가할 때, 그때서야 겨우 정부 재정에 숨통이 트인다. 일본의 정부 부채 비율은 2020년에 225%로 정점을 찍고 작년에 216%까지 내려갔다. 부채 규모는 계속 증가했지만 지난 2년간 명목 GDP 증가율이 부채 증가율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였기 때문에 금리 인상이 가능한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GDP의 200%가 넘는 부채는 여전히 일본을 옥죄는 족쇄다. 그런 일본을 바로 옆에서 보고도 한국 정치인들은 무슨 자신감에 그렇게 정부 돈을 쓴다는 것일까? 한국의 정부 재정이 얼마나 큰 위기에 봉착해 있는지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체하는 걸까? 이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당당히 타개책을 논의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에게 내 한 표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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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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