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올해 처음으로 텃밭에 수박을 심었는데 10개 정도가 열매를 맺었다. 시장에서 파는 수박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 단맛도 거의 나지 않았다. 한여름에 먹어보니 높은 당도의 끈적거림은 거의 없고 담백하면서도 시원해 갈증을 해소하기 좋았다. 수박의 한자식 이름은 ‘서과(西瓜)’다. 서쪽에서 온 과일이란 뜻이다. 중국 명나라의 약학서 ‘본초강목’에는 거란이 위구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얻은 수박씨가 중국에 전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실제 신장위구르자치구와 간쑤성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수박과 멜론 같은 과일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가격도 싸고 맛도 좋다. 수박은 한의학에서 ‘천생백호탕’ 또는 ‘한과(寒瓜)’라고 불릴 만큼 열을 식히는 효능을 높이 평가받았다. 백호탕은 한의학에서 열사병이나 일사병에 쓰는 처방이다. 특히 고열이나 심한 갈증, 가슴이 답답한 번조증을 다스리는 데 쓰인다. 조선 초기 대문장가인 서거정은 자신의 시집 ‘사가시집(四佳詩集)’에서 수박에 대해 “10년 묵은 소갈병(심한 갈증·당뇨병)이 수박을 먹으면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수박이 약재보다 오히려 낫다. 늙은이가 소갈병으로 창자가 끓는 지경에 한 번 씹으니 입맛이 다시 생긴다. 갑자기 내 고질병까지 다 낫게 해 주어 신선이 되어 오른 기분”이라고 극찬했다. 서거정 시대의 수박은 오늘날의 개량 수박과 달리 당도가 훨씬 낮은 대신 수분이 풍부하고 열을 내려주는 효능이 있었다. 백호탕처럼 초기 당뇨 환자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면 지금의 개량 수박에는 혈당 수치를 급격히 올릴 수 있는 단순당(과당)이 많아, 현대 당뇨 환자가 서거정의 기록만 믿고 수박을 많이 먹으면 혈당이 오를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요즘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수박’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 근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은 저서 ‘도문대작’에서 “수박은 고려 때 홍다구가 들여와 처음 개성에다 심었다”라고 기록했다. 홍다구라는 인물은 고려 역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부원배(附元輩) 중 한 명이다. 그는 고려 사람임에도 원나라의 고위 관직에 올라 고려 왕실과 백성들을 혹독하게 괴롭혔다. 삼별초의 난을 잔혹하게 진압했으며 일본 정벌을 위해 백성들을 강제 징집해 원성을 샀다. 이 때문에 수박이 도입된 초기에는 “매국노가 들여온 더러운 과일”이라며 먹기를 꺼렸고,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았다. 겉은 고려인이었으나 속은 원나라...
“매국노 과일” 악명 떨치고 서거정의 소갈병 달랜 수박[이상곤의 실록한의학]〈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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