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여성 캐릭터가 등장했다. 이혜영은 영화 '파과'에서 60대 킬러 '조각'을 맡아 흠집 하나 없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구병모 작가의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에서 40여년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과 평생 그를 쫓은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의 강렬한 대결을 그린 영화다.
소설의 팬층이 두터운 데다, 한국 영화에서는 드물게 나이 든 여성 킬러라는 사회적 통념을 깬 캐릭터가 등장해 제작 초기부터 배우 캐스팅에 큰 관심이 쏠렸다. 영화 팬들이 직접 상상하며 꾸며본 '가상 캐스팅'에서도 늘 1순위로 언급되던 이혜영이 실제로 조각 역에 낙점되면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파과'는 진짜 같다. 액션은 스타일리시 했다. 공간은 서사를 완성하고 음악은 팽팽한 긴장감을 더했다.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섹션에 공식 초청되며 주목을 받은 이 영화는 강렬한 액션과 감성이 어우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존 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노인을 연기한 이혜영의 열연에 대해서도 큰 박수를 받았다.
24일 서울 용산구 CGV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이혜영은 "오늘은 어쩐지 베를린에서 올 때의 기세등등함이 사라지고 초조하고 불안하다"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래서 할 얘기가 없다. 즐겁게 봐주셨다면 감사하다"며 개봉을 앞둔 소감을 밝혔다.
연출을 맡은 김규동 감독은 "처음엔 60대 여성 킬러가 주인공인 액션 누아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만류할 것 같은 프로젝트였다. 왜 이런 이야기를 볼 수 없을까, 오기가 생겼다. 장르적 쾌감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복수와 화해라는 외피가 있지만 상실한 사람들이 상실을 딛고 살아가는 이유, 가치를 찾아 나가는 삶의 의지를 담아낸다면 성공하겠구나 싶어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개봉을 앞둔 데 대해 민 감독은 "기적"이라며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났다"며 기뻐했다.
1981년 데뷔한 이혜영은 영화 '소설가의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등 많은 작품에서 강렬한 카리스마와 독보적인 캐릭터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혜영은 '파과'에서 대체 불가의 매력을 선보였다.
조각은 모든 킬러가 열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전설의 킬러로 ‘대모님’이라 불리고 전설로 추앙받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자신을 쫓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의 등장으로 생애 마지막 방역을 준비한다.
이혜영은 "대사처럼 '늙었다'거나 '폐기물'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통념을 깬 전무후무한 인물"이라고 캐릭터를 소개했다. 이어 "능력 있는 여성을 떠나 한 인간으로 조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늙은 여자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0년간 조각을 쫓은 끝에 최후의 대결에 나선 킬러 투우는 배우 김성철이 연기했다. '지옥', '그 해 우리는' 등으로 사랑받은 그는 이 작품에서 냉혹한 킬러의 면모와 지독한 인연에 불안감을 표출하는 양면적인 모습까지 선보였다.
김성철은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부터 조각과 투우의 빌드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이 에너지가 응축되어 터져야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혜영과 김성철은 많은 액션을 디자인하고 찍고 또 찍었다.
이혜영은 "액션을 시작하려고 하니 부상을 많이 입어서 김성철이 고생했다. 연습할 땐 스턴트랑 해서 과감하게 했는데 촬영 때 막상 저와 부딪히니 힘이 달라 조금 아쉬웠을 거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제 실력보다는 훨씬 능력 있는 여성으로 나온 건 맞다"며 웃었다.
김성철은 "마지막 장면은 해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찍었다"며 "선생님과 합이 중요했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선생님과는 전우애가 생겼다. 짧은 연기 인생이지만 기억나는 순간이 있는데 최근 가장 큰 기억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테이크였다"며 "마지막 장면을 찍고 선생님이 털썩 주저앉으시고, 감독님은 오열하셨다. 셋이 부둥켜안았다. 저는 촬영이 남았는데 마치 영화가 끝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성철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 OST를 직접 불렀다. 민 감독은 "촬영 전부터 투우가 조각에게 바치는 그를 오마주 하는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다. 일 년 내내 다듬다가 용기를 내서 김성철에게 부탁했다"고 귀띔했다.
김성철은 "가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인데 감독이 써준 가사가 좋았지만 부담스러웠다. 엔딩크레딧에 목소리가 나오면 그 자리에 못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감독이 용기를 줘서 하게 됐다. '투우가 유령이 되어 하는 노래'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하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과'는 공교롭게도 마동석 제작, 주연의 '거룩한 밤: 데몬 헌터스'와 같은 날 30일 개봉하게 됐다.
민 감독은 "다양한 영화들이 나와 반갑고 모든 영화의 출산을 응원한다"며 "다만 영화를 시작할 땐 이혜영의 '파과'와 마동석의 '거룩한 밤'이 같은 날 개봉할 거라곤 상상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 같이 많은 관객을 부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요즘 극장에 관객이 줄었는데 극장만이 주는 경험으로 풍성한 체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