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정치-경제 환경에 중단된 한일FTA
정치갈등 완화, 무역구조 바뀌며 여건 조성
美中경쟁 등에 통상전략 카드로 검토할 만
격동의 시대에 ‘어제의 논리’ 가장 경계해야
과거 한일 FTA 협상이 중단된 직접적 계기 중 하나는 역사 문제와 통상 이슈가 뒤엉킨 정치화의 덫이었다. 그러나 2023년 이후 한일 정상회담 재개, 수출 규제 해제, 안보 공조 복원이 이어지면서 정치 리스크는 과거보다 낮아졌다. 물론 여전히 민감한 이슈는 존재하지만, 협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다.
정치적 갈등뿐 아니라, 당시 추진 동력을 약화시켰던 무역 구조의 문제도 상당 부분 달라졌다. 2005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약 240억 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한국의 총수출 대비 대일 수출 비중은 10%를 웃돌았고, 일본은 3대 교역국 중 하나였다. 일본에 대한 원자재, 부품 의존도가 높았고, 무역적자 누증에 대한 우려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2022∼2024년 사이 대일 무역적자는 연평균 220억∼230억 달러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전체 수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이하로 떨어졌다. 과거와 비교하면 절대 규모는 크지 않으며, 교역 구조 자체가 훨씬 안정적이고 다변화됐다.
한국이 수입하는 일본산 품목의 상당수는 소재·장비·중간재로, 국내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투입재다. 한일 간 공급망이 상호의존적이라는 점에서, 교역 불균형이 반드시 손실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일본이 고부가 소재를 독점하고, 한국은 소비재 완제품을 조립 생산하는 수직적 분업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차전지, 차세대 반도체, 로봇 등에서 공동 개발과 투자, 연구개발(R&D) 클러스터 협력이 늘어나며 수평적 협력이 가능해지고 있다. 2024년 기준, 일본 내 한국 기업 R&D 투자 규모는 3년 전보다 4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이 같은 변화된 환경 속에서, 한일 FTA만을 놓고 볼 것이 아니라 다른 통상 대안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 실용성을 따져 볼 필요도 있다. 특히 최근 논의되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의 차별성을 살펴보자.
한일 FTA는 일본이 주도하는 다자 무역협정인 CPTPP와 달리 품목별 개방 로드맵을 설계할 수 있다. 농민단체·지역별 의견 수렴을 전제로 한 단계적 개방도 가능하다. 특히 한국은 이미 16개 FTA에서 농업 보호 조항을 탄력적으로 설계한 경험이 있어, 동일한 방식을 재적용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수용성에서도 큰 장점이다.
CPTPP는 농업 부문 관세의 96% 이상 철폐를 요구하며, 농축수산업에 대한 충격이 크다. 특히 쌀, 쇠고기, 돼지고기 등 민감 품목의 무관세화는 국내 농업계의 극심한 반발을 야기할 수 있다. 반면 한일 FTA는 양자 간 협의를 통해 민감 품목에 대한 맞춤형 보호 조치를 설계할 수 있으며, 실질적인 협상 공간이 존재한다. 농업 분야의 단계적 개방, 분류별 양허 차등, 세이프가드 조항 삽입 등이 가능하다. 특히 제조업 부문에서는 일본의 소재·부품 기술과 한국의 완제품·시스템 기술 간 상호보완적 구조가 명확히 존재해, 공급망 안정화 및 공동 R&D 확산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실현 가능성과 정책 유연성 측면에서 한일 FTA는 CPTPP보다 훨씬 높은 실효성과 설계 유연성을 갖는다. 한일 FTA가 다시 검토돼야 하는 이유는, 단지 과거의 실패를 복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 강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기술·자원 블록화, 그리고 다자주의의 경색은 한국에 새로운 선택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 속에서 한일 FTA는 CPTPP에 대한 선제적 대응 카드이자, 동아시아 경제안보 전략의 중심축으로 재조명될 수 있다. 한일 FTA는 국내 조정과 실익 기반 구축을 위한 전략적 완충 장치가 될 수 있다.이제는 과거의 판단이 옳았는지를 되묻기보다, 지금의 조건에 맞는 해답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질문이 바뀌면 해답도 바뀌어야 한다는 드러커의 통찰은 지금 통상정책에도 유효하다. 한일 FTA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 틀 속에서 다시 검토될 만한 카드다.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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