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원수]법률보다 효율, 선관위가 이 지경이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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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 보완 아닌 무력화하는 ‘선관위 규칙’
공정보다 효율성 강조하다 신뢰 추락 자초
선거 사무는 입법으로 하는 게 헌법 명령
선관위 개혁은 ‘법 최우선’에서 출발해야

정원수 부국장

정원수 부국장
공직선거법 158조 3항은 ‘사전투표관리관은, 투표관리관 칸에 자신의 도장을 찍은 후, 선거인에게 교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유권자가 신분증을 제출하면 해당 선거구의 투표용지를 즉석에서 발급기로 인쇄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사전투표는 본투표와 똑같은 방식이다. 전국 단위 선거에서 사전투표가 처음 시행된 2014년 지방선거 때부터 지금까지 이 법 조항은 그대로다. 그런데 법 시행에 맞춰 선관위는 ‘사전투표관리관의 도장 날인을 인쇄 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자체 규칙을 만들었다. 헌법상 독립기관인 선관위의 규칙 제정은 국회 본회의나 국무회의 의결 같은 절차가 필요 없다.

법률로 복잡한 선거 관리 상황을 일일이 다 규정하긴 쉽지 않다. 원칙적으로 도장을 직접 찍고, 예외적으로 인쇄한다면 법률의 허점을 규칙으로 메운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선관위는 본투표와 달리 사전투표 땐 도장을 찍지 않고 인쇄 날인을 했다. 도장을 하나씩 찍게 되면 유권자의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결국 유권자의 불편이 가중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실상은 선관위가 선거 관리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려는 의중이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직접 도장을 찍으라는 법 조항은 아무도 지키지 않게 됐다. 이 정도 되면 규칙이 법률을 보완하는 게 아니라 무력화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선관위가 선거법에 대한 해석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대로 하지 않는 게 당연시되진 않는다.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하위 규칙이 법률이 정한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소송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7년과 2022년 대통령 선거, 202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이 규칙이 소송 대상이 된 것이다. 대법원에서 1번, 헌법재판소에서 2번 선관위가 이기긴 했지만 한마디로 상처뿐인 승리였다. 선거의 심판인 선관위가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의심이 커졌고, 선관위에 대한 신뢰 추락은 부정선거 의혹을 키우는 불쏘시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12월 헌재의 결정은 마치 선관위를 향해 레드카드를 꺼낸 것 같다. 헌법재판관 9명 중 2명이 규칙이 법률을 위배했다면서 반대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선거 관리 규칙의 합헌성을 재판관 전원 일치로 결론 내지 못한 것도 흠결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반대의견의 논리는 선관위의 기존 주장을 더 궁색하게 했다. “문언의 의미는 직접 도장을 날인하여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고, 그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라면서 선관위의 효율성이 일부 희생되더라도 선거의 공정성을 도모할 것을 사실상 권고했기 때문이다. 헌재의 판단은 영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만에 하나 선관위 규칙 하나를 위법, 위헌으로 판단한다면 전체 선거 결과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선거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관리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다.

이번 지방선거 때 전국적으로 91곳의 투표소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도 효율성 앞에 공정을, 그리고 법률을 희생시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공직선거법엔 투표용지는 하루 전에 시도 선관위로부터 읍면동 선관위에 전달되어야 하고, 투표용지의 일련번호도 인쇄되어야 한다.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 조항이다. 투표용지 바꿔치기 같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 법 조항을 곧이곧대로 지키려고 했다면 투표용지를 넘치게 준비하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투표일에 투표용지를 추가 공급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선관위 발표대로라면 지방선거 당일 투표용지가 각 투표소로 급히 전달됐고, 일련번호를 손으로 썼다고 한다. 위법 여부를 놓고 법정 공방이 있을 수밖에 없다. 투표일에 투표용지가 부족했다면 투표 시간을 당일 오후 10시가 아닌 다음 날 새벽 이후로 연장하는 게 법대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누구나 알고 있는 헌법 1조다. 국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행위가 바로 선거다. 헌법 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되어 있는데, 선거 사무는 당연히 입법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 법률에서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수많은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발생하고 이런 공백을 선관위의 규칙으로, 때로는 유권해석으로 채워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선관위는 법 개정에는 손을 놓고, 선관위의 해석을 규칙보다, 규칙을 법률보다 앞세웠던 것 아닌가. 이 지경이 된 선관위 바로 세우기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법률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른 묘수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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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부국장 needj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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