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K엘리트의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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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정부, 근대화 이끈 관료집단의 직접 통치
정치 포기하고 효율-상명하복 패턴 반복돼
공적 마인드 부재한 K-엘리트 민낯 드러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작년 12월 비상계엄 선포에서 시작돼 대통령 탄핵과 파면으로 이어진 정치적 국면이 이제는 다섯 달째로 접어든다. 대통령 궐위선거를 치르게 될 6월 3일이 지나더라도 어쩌면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는 그 자장(磁場)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본인은 물론이고 관련자들에 대해 수년 동안 다투게 될 형사적 절차가 어떤 결론에 이를 것인지, 또한 새롭게 구성될 정부가 어떤 정치적 청산 과정을 치를 것인지에 따라 한국 정치의 미래 방향이 정해질 것이라는 점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거시적인 맥락에서, 나는 계엄이 우리 사회에 미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꼽으라면 단연코 ‘K-엘리트’의 파산을 꼽겠다. 서울대를 졸업했고 어려운 국가시험을 합격한, 그리고 일선에서 오랜 기간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던 검사, 판사, 관료들이, 통상 우리 공동체의 운명을 믿고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소위 ‘K-엘리트’들이, 생각보다 훨씬 무능하거나 이기적이고, 심지어 공동체에는 해악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K-엘리트는 매우 중대한 역사성을 지니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비롯한 수많은 대한민국의 근대적 과업들이 ‘국가 주도’로 만들어졌고, 그 중심에는 항상 K-엘리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과 일제시대의 강력한 관료제적 전통을 이어받고, 효율성과 결과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막강한 관료 집단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성공한 근대화를 한국에 처음 이끌어낸 집단이었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의 출범은 해당 집단이 최초로 거추장스러운 정치의 외피를 뚫고 나와서 직접 통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매우 유의미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나 잘 아는 것처럼,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런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실패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던 날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훨씬 이전에 결정돼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석열 개인의 결함에서 이 모든 불행의 기원을 찾는 것이 훨씬 손쉬운 이해이기는 하나, 보다 구조적인 문제들을 살피는 것이 미래를 위한 더 나은 교훈이 될 것이다.

첫째, 윤석열 정권이 집권했던 지난 3년은 우리 민주주의 정치의 제도와 절차들이 관료제적 질서와 직접적으로 충돌한 시간이었다. 예컨대, 행정부가 유례없이 시행령을 통해 입법을 대체하려 한 것은 입법-사법-행정을 아울러야 하는 ‘정부’가 철저하게 관료제적 논리로 운용된 대표적 사례다. 시민들을 대신해서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빠르게 가는’ 관료제적 미덕을 윤 전 대통령이, 혹은 우리의 관료 집단이 너무 신봉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 전 대통령의 ‘순수한 의도’를 인정하더라도 수많은 실패 사례들은 하나의 패턴을 이룬다. 청와대 이전에서부터 의대 증원에 이르기까지,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에 접근하는 방식이 하나같이 고되고 느린 숙고와 설득이라는 정치의 절차를 포기했다. 그 대신 신속과 효율, 상명하복이라는 관료제적 경로를 선택한 것이 문제였다는 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 과정은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폭발한 것일 따름이다.

둘째, 동시에 윤석열 정권의 집권 기간은 한국의 발전국가를 이끌었던 엘리트 집단의 숨겨진 무능과 둔감, 혹은 치명적 결함이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했다. 제3세계에서 보편화된 ‘빼먹기 정치(kleptocracy)’를 주도했던 독재자 패밀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공정한 절차로 선발된 국내 최고의 엘리트들이 전문성과 실력, 실행력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자부심은 1970년대에 시작됐다. 한국 능력주의의 원형이 바로 이 K-엘리트로부터 주조되지 않았겠는가. 이제 50년이 지나 명문대 입시가 바뀌고 판검사, 관료, 교수, 의사가 되는 경로들이 조금씩 변화하기는 했지만, K-엘리트의 집단의식과 허위의식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번 정권에서 드러났다. 근거 없는 자신감, 법 테두리 내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은 여야좌우를 막론한 K-엘리트의 공통점이지만, 아마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보다는 가족과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공적 마인드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스스로 자녀들에게 비밀스럽게 욕망하고 강변하는 것처럼, 젊은 날 한때 성취한 업적이 평생을 가며, 그것이 도덕적 우월성과 판단력, 인격까지도 보장한다는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서 이 대통령을 뽑지는 않았을까. 그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후, 사저에 돌아와서 지지자들에게 했던 말은 그래서 “다 이기고 돌아왔다”는 터무니없는 강변이었고, 그것은 K-엘리트가 최종적으로 파산한 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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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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