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오는 공염불이 있다. ‘바이오산업 육성’이다. 문재인 정부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바이오산업을 ‘제2의 반도체’로 키우겠다며 국가 비전까지 선포했다. 2030년까지 제약·의료기기 세계시장 점유율을 1.8%에서 6%로 높이고, 500억달러 수출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지금이 바이오·헬스 세계시장에서 앞서갈 최적의 기회”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정작 현장에서 벌어진 일들은 요란했던 구호와는 많이 달랐다.
업계 들쑤신 삼성·인보사 수사
삼성바이오로직스 수사가 대표적이다. 검찰은 2018년 12월 회계 부정 혐의를 들여다보겠다며 삼성바이오로직스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공인회계사회도 적정한 것으로 판단한 회계 처리를 문재인 정부의 우군인 참여연대가 문제 삼아 이슈화한 결과였다. 해외시장에서 ‘K바이오’ 대표주자이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기업 이미지는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검찰이 수사심의위원회의 반대에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에 대한 기소를 강행하자 더불어민주당에선 “국민의 승리”라는 논평까지 내놨다. 재판 결과는 검찰과 참여연대, 민주당의 완패였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달 이 회장 등 사건 관련자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인보사 사태’도 비슷한 사례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9년 5월 허위 자료 제출을 이유로 코오롱생명과학의 골관절염 치료제 인보사의 제품 허가를 취소하고, 회사를 검찰에 고발했다. 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시절에 인보사 허가가 나왔다며 “(정권 차원의) 조직적인 범죄”라고 주장했다. 이후 약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 등 회사 경영진은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식약처와 검찰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또다시 바이오산업 육성을 부르짖고 있다.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 보수 정당’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내세우며 바이오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고 나섰다. 조기 대선을 겨냥한 사실상의 선거 구호다.
선거 구호 된 '바이오 육성'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5대 바이오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기 위해 국가 투자가 필요하다”며 권역별 특화 발전 전략, 연구개발(R&D) 및 금융 지원 등을 통해 바이오산업 생태계를 조성해가자고 제안했다. 민주당은 또 같은 달 ‘미래산업 경청 간담회’를 열어 바이오·헬스 기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만들자고 했다.
관건은 유권자들이 민주당의 구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지다. 바이오산업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또다시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법 족쇄에서 풀린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올해 제약·바이오 업체로는 처음으로 매출 5조원을 돌파한다는 청사진을 내걸었다. 코오롱은 인보사를 연 매출 4조원 규모 의약품으로 키운다는 목표로 미국에서 막바지 임상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바이오산업을 정치에서 해방시키는 게 가장 필요한 육성책일지도 모른다. 신성장동력을 찾는 기업인들이 있어야 할 곳은 검찰청사도, 재판정도, 국회도 아니라 산업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