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한국 포탄의 질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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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칼럼] 한국 포탄의 질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

“쌀 한 가마니…발사!” 전차 포탄을 쏘며 했던 말이다. 전차포 사격 훈련은 한 번에 4발, 쌀 네 가마니를 쏜 이후 끝난다. 1.2㎞ 밖에 있는 전차 모형에 4발을 정확하게 꽂지 못하면 그날은 전차병들 초상날이다. 없는 살림에 국민 혈세로 만든 걸 함부로 낭비했으니 기합받는 게 당연할 수 있겠지만 어찌나 혼났던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이 한참이던 때 일본 도쿄 출장 중이던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바쁜 일정 속에서 당시 신격호 롯데제과 사장과 약속을 잡았다. 경제 개발을 해야 하는데 외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그 시절 일본에서 크게 성공한 신격호에게 한국 투자 요청은 반복적으로 있었고 제철 사업에 투자하기로 약속까지 했는데 장기영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총알 한 발을 못 만들어 미국에서 전량 수입해 쓰고 있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한국에 투자하기로 결심한 걸로 아는데, 이왕이면 군수산업에도 투자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장기영의 이야기를 듣던 신격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한참을 고심하던 신격호는 조심스레 답했다. “제가 군수용 오일 공장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두 번이나 미군 폭격으로 날려먹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재기하면서 군수 관련 사업을 다시는 안 하기로 이해관계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다들 그 약속을 기억하는데 깨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도쿄에 그 사업에 ‘딱’인 인물이 하나 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신격호보다 두 살 아래인 류찬우, 6·25전쟁 이후 미국 무역회사 한국지사에서 일하다가 1959년 도쿄에 무역회사를 창업해 큰돈을 벌어들인 인물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회동 자리에서 신격호가 류찬우를 설득한다. “동생, 모국이 총알 하나 못 만드는 상황이라 군수산업을 일굴 인물이 절실하다는데 자네 같은 적임자가 천지에 또 어디 있겠나? 모국으로 돌아가 자네 조상의 이름을 걸고 제대로 한번 해볼 생각 없는가? 나도 물심양면으로 돕겠네.” 이야기를 들은 류찬우는 두말하지 않고 승낙한다. 그리고 일본 내 재산을 싹 정리해 귀국한 후 새로운 기업을 설립했는데 자신의 본관을 회사 이름으로 내건다. ‘풍산’의 시작이 그러했다.

그는 ‘풍산 류씨’이고 7년이나 지속된 임진왜란 시절 6년간 영의정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한 류성룡의 12대손이다. 류성룡은 전쟁 직전 이순신과 권율을 왕에게 천거해 중책을 맡겼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미리 경고해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의 ‘징비록’을 저술했다. 1695년 일본에 유출된 ‘징비록’은 즉시 일본어로 번역돼 30번 이상 출판됐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나중에는 베이징에서도 출간됐으며 주일 영국 외교관이 영어로도 번역했다. 일본이 이순신 장군의 진면목을 제대로 확인한 것도 이 책을 통해서라고 하는데 조선은 어떠했을까? 류성룡 퇴임 이후 서인이 장기 집권하면서 이황의 제자이자 남인인 류성룡은 사정없이 평가절하됐고 ‘징비록’은 후손들 손에 4회에 걸쳐 겨우 800권 인쇄되며 잊혔다. 그러니 권력을 탐하며 정쟁에만 몰두하던 조선의 ‘양반’들에게 군비 태세를 강조한 류성룡의 경고가 들렸을 리 만무했다. 그랬으니 일본에 다시 당할 수밖에.

류찬우는 낙동강 방어전의 최대 격전지를 선택해 공장을 세운다. 뚫리면 모든 게 끝나는 상황에서 총알마저 부족해 인당 수류탄 2개를 지급하며 목숨을 걸고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령한 ‘안강’에서 조상의 이름을 내걸고 총알과 포탄을 생산한다. 그것도 일본에서 벌어온 초기 자본으로 말이다.

기업의 존재 이유와 사회적 책무는 공자님 말씀으로 치부되고 주가로 모든 걸 평가하는 품격이 사라진 세상이라지만 그런 정신으로 만드는 제품이 ‘그냥 제품’일 수는 없겠지. 우크라이나 전쟁에 공급된 북한 포탄 품질이 엉망이라는 뉴스를 보며 시장의 변덕과 관계없이 ‘징비’ 정신을 지켜온 기업이 몇 곳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류찬우가 일본에서 들고 온 그 자금, 베스트셀러 ‘징비록’ 인세와 누적 이자보다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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