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가 수술대에 올랐다. 기획재정부로 금융정책 권한 이전, 금융감독위원회 신설이 큰 줄기다. 금융위원회는 초긴장이다. 반면 금감원은 노조까지 환영하고 나섰다. 그런데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저축은행 사태 같은 모멘텀이 없는 가운데 새 정부 출범에 맞춰 부처 간 업무 조정 차원에서 논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개편 작업의 성공은 뚜렷한 철학과 목표에 달렸다. 거시건전성 정책을 포함해 그림을 더 크게 그리면 어떤가. 그것이 글로벌 금융위기 교훈이자 선진국의 대응 방향 아닌가.
우선 거시건전성 정책의 주체로 한국은행을 인정할 때다. 물론 지금도 건전성 정책의 한 축은 한은이 맡고 있다. 하지만 곁불 쬐는 수준이다. 정책 수단은 대부분 금융위가 틀어쥐고 있다. 법상 한은에 허용된 수단마저 금융위가 행사한다. 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이 대표 사례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금융기관 대출의 최장기한 및 담보의 종류’를 제한할 수 있다(한은법 제28조 제17호). 이를 금융위는짐짓 외면한다. 그런 행태가 거시경제 운용에 발목을 잡아 왔다. 예를 들면 이렇다.
첫째, 경기 부양에 필요한 기준금리 인하를 가로막았다. 2024년 8월 경제 상황은 금리 인하가 다급한 때였다. 그런데 하필 수도권 주택 가격이 연율 20% 급등하고 가계대출도 10조원 폭증했다. 건전성 수단이 없는 한은은 금융위만 쳐다보며 엉거주춤하다가 동결에 그쳤다. 경기 침체 우려가 컸음에도 금리 인하를 망설인 것이다.
건전성 수단을 갖춘 뉴질랜드 중앙은행은 한은과 사뭇 달랐다. ‘선(先)건전성 정책 조치-후(後)기준금리 인하’ 순서로 발 빠르게 대처했다. 부동산 과열을 다스리는 한편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의 이자 상환 부담도 덜어줬다. 두 마리 토끼(금융안정·경기부양)를 동시에 노린 것이다.
둘째, 가계부채 증가를 부추겼다. 2014년 7월 내수 경기가 어려워지자 느닷없이 거시건전성 수단이 동원됐다. LTV와 DTI 규제를 대폭 완화한 것이다. 정부발(發) ‘빚내서 집 사라’는 메시지다. 부동산 불패론에 힘을 실어준 꼴이다. 결론은 가계부채 폭증이다.
가계부채는 건전성 수단을 누가 쥐고 있는지에 따라 증가 패턴에 차이가 크다. 감독당국이 독점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높은 경향을 보인다. 2024년 말 통계는 다음과 같다. 한국(90.1%) 캐나다(100%) 호주(112%) 스위스(125%)는 감독당국이 건전성 정책 주체다. 반면 미국(69%) 프랑스(61%) 영국(76%) 벨기에(57%)는 중앙은행 소관이다. 영국이 눈에 띈다. 2008년 96.9%에서 2024년 76.0%로 크게 떨어졌다. 같은 기간 한국은 68.1%에서 90.1%로 치솟았다. 영국은 2013년 금융감독청을 폐기하고 건전성 감독 기능을 중앙은행에 넘겼다.
국제적으로도 거시건전성 정책은 중앙은행이 담당하는 게 대세다. 게다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미시건전성 감독도 중앙은행이 담당한다. 우리나라 통합감독체계는 영국을 본떠 1998년 도입했다. 정작 영국은 2013년 이 모델을 버리고 종전으로 돌아갔다. 문제점이 노출돼 팽(烹)당한 구닥다리를 우리만 부여잡고 있다. 한심하고 서글픈 모양새다.
한은법 1조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설립 목적으로 제시한다. 두 목표는 자주 부딪친다. 이러다 보니 한은의 어정쩡한 대응이 비판받곤 한다. ‘금융안정’의 경우 책임만 있고 걸맞은 수단을 못 갖춘 탓이다. 2008년 글로벌 위기 이후 세계적 추세에 맞춰 한은에 금융안정이 책무로 부과됐지만 감독당국의 견제로 이렇다 할 수단이 부여되지 않은 때문이다.
가계부채는 20년 넘게 계속 늘고 있다. 새로운 거시건전성 플레이어 등장이 시급하다는 신호 아닐까. 최소한 LTV, DTI,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의 점검과 조정은 한은에 맡길 때다. 금융기관의 신용 창출은 통화신용정책 바로 그 자체인 까닭이다. 주요국이 건전성 수단을 중앙은행에 집중한 배경이기도 하다. 한은이 빠진 금융감독체계 개편 논의가 부실해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