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 칼럼] 정주영을 정몽주로 기억하는 사회

1 month ago 11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기자

정몽주. 필기시험 답안지 채점을 시작하자마자 엉뚱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굳어졌다. ‘주요 5개 그룹 창업자 이름을 쓰라’는 올해 한국경제신문 입사 시험 문제에서 현대그룹을 일군 기업가(정주영)로 고려말 충신을 답안으로 적은 지원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SK그룹(최종현), LG그룹(구인회)은 정답률이 다소 낮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병철(삼성그룹), 정주영이란 이름 석 자를 젊은이들이 모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영화 ‘타짜’ 속 평경장이 내뱉는 “고니야 부자가 되고 싶니? 이거이 이병철이고, 이거이 정주영이야”라는 대사도 요즘 세대에겐 ‘암호문’이지 싶었다. 창업주 5인을 정확하게 쓴 수험생은 단 두 명이었다.

황당한 오답의 부끄러움이 젊은 지원자만의 몫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업에 무심한 것이 어디 청년만이겠나. 한국 사회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6624달러(2024년)의 풍요 속에 살지만 이런 번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부가 어디서 나왔고, 성공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관심 밖이다.

학교 교육부터 그렇다. 10년 전 국정교과서 파동 당시 8종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서 이병철·구인회 회장이 전혀 등장하지 않아 논란이 일었다. 정주영 회장도 일부 교과서에서 ‘소 떼를 북한에 보낸 사람’으로 지나가듯 언급됐을 뿐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현행 한국사 교과서들은 여전히 경제성장은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고 기술한다. 경제 관련 챕터가 아예 없는 경우(해냄출판사)도 있다. 전태일은 빠짐없이 다뤄지고 ‘동일방적사건’(동아출판사 271쪽), ‘광주대단지사건’(금성출판사 278쪽) 같은 노동·사회 이슈에는 자세한 설명이 달린다. 반면 창업주 이름은커녕 기업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기업은 ‘정경유착’(금성출판사 278쪽)과 ‘재벌’(미래엔 272쪽)이라는 음습한 추상어 속에 뭉뚱그려 비칠 뿐이다.

이병철·정주영 이름을 접하지 못했으니 호암미술관, 서울아산병원을 드나들면서도 호암 이병철·아산 정주영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로비 한구석에 흉상만 쓸쓸하게 서 있을 뿐이다. 유년 시절의 짧은 인연을 앞세워 이세돌바둑기념관(전남 신안군)을 세우는 지방자치단체만큼의 관심도 우리 사회는 기업에 기울이지 않는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기업인 알리기’ 노력조차 핵심을 비켜난 모습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은 2022년 삼성그룹 이병철, LG그룹 구인회, GS그룹 허만정, 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자가 수학한 진주 지수초등학교를 ‘K-기업가정신센터’로 개조해 문을 열었다. 지난해 6월까지 누적 방문객이 10만 명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센터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흑백사진에 연대기만 적어놓은 전시 패널, 부자소나무 모형을 조립하는 체험학습만으로는 ‘기업가정신’을 오롯이 느끼긴 힘들어 보인다. 기업가의 고뇌와 결단, 난관을 극복하는 의지에 주목하기보다 ‘솥바위 반경 20리 이내에 큰 부자가 나올 것’이라는 풍수지리에 곁눈질부터 한 탓은 아닐까.

미국 뉴욕에는 석유산업을 일으킨 존 록펠러의 이름을 딴 록펠러센터가,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의 아버지’ 헨리 포드를 기리는 헨리 포드 박물관이 우뚝 서 있다. 일본 1만엔권 지폐에는 도쿄가스 등 500여 개 기업을 세운 시부사와 에이이치 초상이 담겨 있다. 하지만 큰 기업을 일군 창업자의 발자취를 곱씹어볼 기념관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게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정주영·이병철을 기억하지 않는 사회에서 ‘제2의 삼성·현대’가 나오기를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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