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인쇄술, 지식 확산으로 지적혁명 야기
컴퓨터-AI, 인간에 대한 인식까지 바꾸는 중
2차 지적혁명 중차대한 시기에 허송한 한국
‘100조 투자’ 구호 대신 내실 있는 계획 필요
태초에 인류가 집단으로 함께 살기 시작한 이유는 사냥과 채집에서 더 많은 식량을 구하고, 맹수나 다른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농업혁명이 시작된 약 1만 년 전부터 집단의 규모가 훨씬 커지면서 마을과 도시 등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언어, 표정, 그리고 몸짓 등으로 소통하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여기서 언어는 인간만이 지닌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전달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언어이기에, 신뢰를 위한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중하다.
사실 인류사의 대부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언어밖에 없었다. 그러나 약 5000년 전 등장한 문자는 혁명을 일으켰다. 중국 황허 유역을 비롯한 이른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특징은 모두 문자를 쓰기 시작한 곳이라는 점이다. 언어로만 전달되던 지식은 문자를 통해 쌓이기 시작했고, 그 덕에 인류는 석기시대를 벗어나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어와 더불어 문자가 자리를 틀며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붓과 펜으로 종이 한두 장에 기록되던 지식은 그 양이 늘면서 책자의 형태로 가공됐다. 가치 있는 한 권의 책은 다시 여러 권으로 복제됐는데, 이 일도 모두 손으로 옮겨 쓰는 작업이 필요했다. 결국 책은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지닐 수 있는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당연히 지식의 전달과 확산은 지극히 제한됐고, 인류는 그렇게 수천 년을 지냈다.그러나 약 500년 전 발명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책자의 대량 발간을 가능하게 했고, 그 결과는 또 한 번의 혁명이었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출판한 책자 ‘95개조 반박문’인데,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내용으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됐다. 1687년 아이작 뉴턴이 발간한 ‘프린키피아’는 인류를 자연과학이란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으며, 이는 훗날 산업혁명의 씨앗이 됐다. 언어와 문자만이 존재하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출판된 책이 들어오면서 인류는 사고 방식, 지식 체계, 세계관 그리고 학문적 패러다임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소위 ‘지적(知的) 혁명’을 겪었다.
그런데 50여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된 컴퓨터 기술은 또 다른 지적 혁명을 야기하며 새로운 사회를 열 것으로 보인다. 발전된 디지털 네트워크가 추동하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 소통, 무너지고 있는 지식의 경계 그리고 탈권위주의 등은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 변화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는 그간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해 온 방식부터 인간 스스로에 대한 인식까지 모조리 바꿔야 하는 커다란 전환점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적 혁명은 최근에 인공지능(AI)이 도입되면서 더욱 가시화됐다. 우리가 여태껏 지녀 왔던 언어, 문자 그리고 책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단순한 도구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AI는 이러한 도구적 기능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에 그 영향은 짐작하기 힘들다. 이미 AI는 과학기술 분야는 물론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 활동에서도 놀라운 역할을 하고 있다. AI가 대부분의 화이트칼라 직업을 대체할 것이라거나 인간 지성을 압도할 것이라는 예측은 물론 과장된 것이다. 그럼에도 향후 우리가 어떻게 AI를 이용하고 제어할 것인가는 중요한 이슈다. AI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스스로 의견을 만들고 이를 전달할 수 있는 존재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대한민국은 황당무계한 계엄에서 비롯된 정치적 열병으로 꼭 반년을 허송했다. 이제 새로이 출범한 정부는 국가 백년대계의 측면에서 AI 발전을 이끌며 AI로 인한 사회 변화에 철저히 대비하면 좋겠다. ‘AI 100조 투자’나 ‘AI 3대 강국’ 같은 선거용 구호는 접어 두고 훨씬 더 꼼꼼하고 내실 있는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앞으로 5년은 미래 어느 정부에도 더는 주어지지 않을 대한민국의 골든타임이다.김도연 객원논설위원·태재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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