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슈퍼엔 日 쌀 품절돼 미국 쌀만
수입 쌀 카레, 볶음밥용 ‘선택지’
쌀값 고공 행진에 분식으로 대체도
수입 쌀 가격도 두 배 되며 부담↑
비축미 풀었지만 쌀값 안정 미지수
정책 실패, 7월 참의원 선거 변수
이곳은 경쟁 슈퍼보다 초저가를 앞세우고 대신 계산을 현금만 받는 곳으로 식당 주인은 물론이고 호주머니가 가벼운 일본 서민들도 생필품을 사러 몰리는 곳이다.
지난해 여름에 시작된 일본 내 쌀값 폭등이 최근까지 이어지는 현장을 보기 위해 찾은 이 슈퍼의 쌀 매대에는 일본에서 생산된 쌀이 한 포대도 보이지 않았다. 떡을 만드는 데 주로 쓰는 1kg 일본산 찹쌀을 빼고,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일반 쌀은 미국 캘리포니아산 수입 쌀 ‘칼로스’ 5kg짜리 5포대가 매대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쌀값이 급등하며 ‘고시히카리(명품 쌀 품종)의 나라’ 일본의 서민들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미국산 저가 수입 쌀이 된 것.
심각해지는 일본 쌀 유통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처럼 보였다.》
● 美 캘리포니아산 쌀 찾는 일본 서민들
나흘 뒤 저녁에 다시 찾은 슈퍼에는 품절됐던 일본 쌀들이 다시 채워져 있었다. 가게 점원 우시로 씨는 “며칠 전에는 일본 쌀이 일시적으로 품절됐던 것이지 아예 공급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일본 쌀을 찾는 사람이 많다. 다만, 쌀값이 1년 가까이 계속 오르기만 하는 상황이기에 상대적으로 값싼 미국, 대만 쌀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어제 대만 쌀이 들어왔는데 오늘 벌써 다 팔렸다. 대만 쌀보다 인기는 적은 편이지만 미국 쌀을 찾는 사람도 생각보다 꽤 있다”고 귀띔했다. 이 슈퍼에서 파는 미국과 대만 쌀은 5kg짜리가 똑같이 3542엔(약 3만4500원·이하 세금 포함)에 팔리고 있었다. 일본 쌀 가운데 가장 저렴한 아오모리(靑森)현 쌀보다 659엔(약 6400원) 저렴했다.쌀 매대 앞에서 만난 60대 일본 여성은 “쌀값이 올라 부담이 되지만 아직 수입 쌀을 산 적은 없다”면서 “카레나 볶음밥을 해 먹으면 밥맛이 괜찮다고 들었다. 그래서 가계에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수입 쌀을 찾는다”고 말했다.
● 한국 쌀 가격의 두 배 수준 된 일본 쌀
일본의 농림수산성은 전국 수퍼 약 1000곳의 쌀 판매 가격을 확인해 발표하는데,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2일까지 판매된 쌀 5kg의 가격은 3952엔(약 3만8600원)이었다. 현재 한국에서 쌀 5kg이 보통 2만 원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두 배가량 비싼 것. NHK방송은 “1년 전에는 쌀 5kg이 2000엔 정도였다. 최근 1년 사이 쌀값이 94.6%까지 폭등했다”고 전했다. 쌀 5kg이 3000엔대 후반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전국 평균 가격으로, 물가가 비싼 도쿄에선 이제 5000엔이 넘는 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7일 도쿄 시니가와구 오사키 지역에 자리잡은 슈퍼 체인 ‘라이프’의 쌀 매대에는 일본 쌀 5kg 제품들이 보통 4000엔대 후반에서 5000엔대 중반 사이에 가격이 표시돼 있었다. 30년 넘게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 재일교포는 “일본에 살면서 쌀 5kg짜리가 5000엔대를 넘은 것은 처음 봤다”며 “충격적인 가격”이라고 말했다.비싼 쌀값으로 인한 서민의 고통은 커지고 있다. 슈퍼에서 만난 60대 여성 사카에 씨는 “쌀값이 오르기만 해서 매우 난감한 상황”이라며 “하루 세 끼 가운데 아침은 주로 빵을 먹으며 조금이라도 식비를 줄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는 한 30대 여성은 “쌀값이 지나치게 오르기만 해서 이제는 쌀값을 줄일 어떤 방법을 찾기에도 지쳤다. 아예 포기한 상황이 됐다”고 혀를 찼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이들에게는 쌀밥을 먹이고 어른들은 우동이나 소바 등을 먹는 가정도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산 쌀값뿐 아니라 수입 쌀 가격도 덩달아 올라 서민의 선택지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미국산 칼로스 쌀 5kg의 가격은 1800엔 정도였는데, 지금은 역시 2배가량 오른 상황이 됐다. 이런 가운데 일본 민간 기업이 지난 1년(2024년 4월 ∼2025년 3월)간 정부에 신청한 쌀 수입 물량은 올해 1월 말 기준 991t으로, 수입 쌀 물량이 가장 많았던 2020년(426t)의 2.3배가 됐다고 요미우리신문이 15일 전했다. 최근 백악관 대변인이 “일본의 수입 쌀 관세는 700%”라며 압력에 나선 것도 일본의 쌀 수입 물량을 더욱 늘리기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 비축미 21t 시장에 풀어, 밥공기 29억 개분
쌀값의 고공 행진이 이어지고 있지만 뚜렷한 원인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일본 농업계는 2003년 폭염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와 지난해 8월 난타이 대지진 발생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일어난 사재기 현상에 이어 유통업체와 가정의 쌀 확보 경쟁이 더해져 쌀값이 계속 오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비싸니’ 일단 확보하고 보는 풍조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뒤늦게 정부 비축분인 쌀을 민간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일본은 흉작 등에 대비해 100만 t의 쌀을 전국 300개 창고에 나눠서 보관 중인데 이 가운데 21만 t을 쌀 가격 안정을 위해 판매키로 한 것. 밥공기로 치면 29억 개 분량에 달한다고 NHK는 설명했다. 1억2000여만 명인 일본 인구 전체가 24끼를 먹을 수 있는 규모다.일본 정부는 2011년부터 쌀 100만 t을 비축하는 제도를 시작했는데 쌀값 안정을 이유로 비축미를 시장에 푼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미 경매 절차는 마쳤으며 이달 말부터 소비자들에게 공급될 것으로 보인다.
밥맛에 민감한 일본 소비자들이 창고에 묵혀 놨던 정부 비축미를 얼마나 선택할 것인가가 쌀값 안정의 변수로 떠올랐다. 일본 농림수산성은 “비축미 창고의 내부는 1년 내내 온도는 15도 이하, 습도는 60∼65%로 유지되고 있다. 5년간 보관된 쌀도 밥을 지으면 맛이 있다”고 대대적인 언론 홍보에 나서고 있다.
● 7월 참의원 선거 변수가 된 쌀값 안정
정부 비축미가 시장에 공급되면 쌀값이 다소 안정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지만, 생각보다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이러자 일본 정부는 이번 비축분을 통해 쌀값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추가로 정부 비축분을 풀 수 있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시장에 내보내고 있다.
특히 올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쌀값 안정 여부가 승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일본 총리는 지난달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쌀값이 비싼 것을 실감한다”며 “실제로 슈퍼마켓에 가면 쌀이 없는 등 소비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뒤늦게 쌀값 정책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하며 부랴부랴 비축미를 푼 것도 결국 선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라는 게 일본 언론의 분석이다.
황인찬 도쿄 특파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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