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이슈/하정민]트럼프에 드리운 체임벌린의 그림자

2 days ago 5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사진)과 밀착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폴란드 등은 현 상황이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의 병합을 영국이 지지한 1938년의 ‘뮌헨 협정’과 유사하다고 우려한다. 모스크바·워싱턴=AP 뉴시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사진)과 밀착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폴란드 등은 현 상황이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내 주데텐란트의 병합을 영국이 지지한 1938년의 ‘뮌헨 협정’과 유사하다고 우려한다. 모스크바·워싱턴=AP 뉴시스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독일에서 평화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입니다.”

1938년 9월 네빌 체임벌린 당시 영국 총리는 독일 뮌헨에서 독일계가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나치 독일에 양도하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여섯 달 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 독일이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귀국한 체임벌린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의 총리 관저 앞에서 자신이 전쟁을 막았다며 그 유명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다. 1919년 탄생한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협정에서 완전히 소외됐다. 강대국 독일이 영토 일부를 삼키고 또 다른 강대국 영국이 이를 지지하는 과정을 지켜봐야만 했다.

체임벌린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여파 등으로 경제가 좋지 않았다. 약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켜서라도 전쟁을 피하겠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다만 평화는 고작 6개월짜리였다. 나치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 전체를 합병했다. 같은 해 9월 폴란드도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실각했고 반년 후 숨졌다. 영국 또한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미국에 넘겨줬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협상 과정에서 일방적인 친(親)러시아 노선으로 일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보노라면 체임벌린이 떠오른다. 중국 견제를 위해 러시아가 필요하고 우크라이나와 광물 협정을 맺어 그간의 군사 지원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미국의 이해관계로만 보자면 수긍할 수 있다.

문제는 2000년 집권 후 권위주의 통치로 일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신뢰할 만한 파트너냐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강제합병,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침공 때 모두 “이곳에 거주하는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곳은 어디든 침공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오스트리아와 주데텐란트를 손에 넣고 폴란드로 진격할 때 나치 독일도 같은 이유를 댔다. 러시아군, ‘푸틴의 사병(私兵)’으로 불리는 러시아 민간 군사회사 바그너그룹은 살인 혐의로 복역 중인 죄수들까지 전쟁에 동원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부차, 이르핀, 모티진, 보로댠카, 호스토멜 등 곳곳에서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손발이 묶여 저항할 수도 없는 시민을 러시아가 대거 살해한 광경을 전 세계가 목격한 게 불과 3년 전이다.

이런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발트 3국, 몰도바, 폴란드 등과도 갈등을 빚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현 상황이 중국, 북한 등에 ‘잘못된 판단’을 할 신호를 주지 않을 것으로 자신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난해 6월 영국 시사매체 이코노미스트 기고에서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하면 세계의 제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교장관은 지난달 CNN의 유명 앵커 파리드 자카리아와의 인터뷰에서 체임벌린과 뮌헨 협정을 거론했다. 그는 “유럽에 있는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것”이라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외쳤다.

1999년 12월 BBC는 역사가, 정치인, 평론가 등을 상대로 20세기 영국 총리 20명의 순위를 매겼다. 1위는 체임벌린의 후임자이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체임벌린은 19위였다. 1956년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패해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뺏긴 앤서니 이든 전 총리가 없었다면 체임벌린이 ‘꼴찌’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이 조사를 실시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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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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